동제사 간부들이나 유동열 등이 이미 공화주의자로 변신하고 있었음에도 이처럼 제정체제를 표방한 것은 일종의 임시 방편책이었다. 그런데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인 성낙형이 이를 주장한 것을 보면, 그는 신한혁명당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부는 북경에 두고, 지부는 중국의 상하이 · 한커우(漢口) · 펑톈(奉天) · 창춘(長春) · 안둥현(安東縣) · 옌지부(延吉府), 국내의 서울 · 원산 · 평양 · 회령 · 나남 등지에 두었다.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본부장에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외교부장은 성낙형, 교통부장은 유동열, 재정부장은 이춘일, 상하이지부장은 신규식, 감독은 박은식, 창춘지부장은 이동휘(李東輝) 등이 각각 맡았다.
이들은 두 가지 활동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안펑선(安奉線) 철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이라는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구상은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락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구상도 성낙형이 1915년 7월 서울에 들어와 변석붕(邊錫鵬) 등 수 명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두 가지 구상이 모두 무산된 이후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활동이 쉽게 중단되었던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들의 분석이 중국의 일본에 대한 굴복으로 빗나가 버린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동제사의 간부인 신규식 등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긴밀한 관계를 계속 가지는 등 공화주의 노선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을 표방하는 신한혁명당의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