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한 ()

김의한
김의한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비서,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광복군총사령부 주계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김재한(金載漢), 김의환(金毅煥)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51년
출생지
서울
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비서,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광복군총사령부 주계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은 김재한(金載漢)·김의환(金毅煥). 서울 출신. 아버지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이다. 부인은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아버지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상하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해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해 5월 초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로 이전을 하였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을 모시고 저장성[浙江省]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다.

1934년 1월 이동녕·김구·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뤄양군관학교분교[洛陽軍官學校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해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그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 정착한 뒤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가 광복군(光復軍) 활동을 정식으로 동의한 뒤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되었다. 1943년 8월부터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광복군』(이현희, 독립기념관, 1990)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976)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974)
『독립운동사』4,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4)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8, 13(국사편찬위원회, 1969·1973)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1932)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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