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중화군에 접하고 있다. 4,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서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기자조선·위만조선·낙랑·고구려 등의 도읍지였으며, 옛 이름으로는 왕검성(王儉城)·기성(箕城)·낙랑(樂浪)·서경(西京)·호경(鎬京)·유경(柳京) 등이다. 동경 125°43′∼ 125°45′, 북위 38°59′∼ 39°02′에 위치하며, 면적 92.5㎢, 인구 약 40만 명(1943년 당시)이다.
산수(山手)·항(港)·수(壽)·남문(南門)·대화(大和)·욱(旭)·천(泉)·남산(南山)·팔천대(八千代)·행(幸)·남(南)·동(東)·죽원(竹園)·교구(橋口)·홍매(紅梅)·약송(若松)·서(西)·황금(黃金)·암(巖)·유(柳)·빈(濱)·진(賑)·본(本)·앵(櫻)·상수(上需)·설암(薛巖)·창전(倉田)·경상(慶上)·경제(鏡齊)·신창(新倉)·기림(箕林)·전구(磚九)·아청(衙廳)·능로(陵路)·진향(眞香)·수옥(水玉)·순영(巡營)·이향(履鄕)·대찰(大察)·하수구(下水口)·장별(將別)·계(鷄)·관후(舘後)·상수구(上水口)·신양(新陽)·경창(景昌)·죽전(竹典)·감점(監店)·이문(里門)·채관(釵貫)·평천(平川)·서성(西城)·당산(堂山)·인흥(仁興)·능라(綾羅)·동대원(東大院)·신(新)·선교(船橋)·양각(羊角)·구정(九井)·서내(西內)·봉수(鳳岫)·대치령(大馳嶺)·내(內)·상흥(上興)·감북(坎北)·용흥(龍興)·미산(嵋山)·청암(淸巖)·오촌(鰲村)·의암(衣巖)·문수(紋繡)·율(栗)·대신(大新)·불당(佛堂)·장진(將進)·오야(梧野)·정백(貞柏)·석암(石巖)·토성(土城)·조왕(助王)·사동(寺洞)·빈(蘋)·미림(美林)·추을(秋乙)·송신(松新)·장지(長池)·신동창(新東倉)·장천(將泉)·구동창(舊東倉)·칠산(七山) 등 91개 동리로 되어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산수동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아주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동강 하류의 대동군과 중화군 일대에 걸쳐 발달하고 있는 낙랑준평원의 일부를 차지한다. 숙천 방면에서 뻗어내린 자모산맥(慈母山脈)의 여맥이 침식되어 낮은 준평원을 형성하며, 서쪽은 도두산(都頭山, 83m)·창광산(蒼光山, 49m), 북쪽은 모란봉(牡丹峰, 96m) 등의 잔구성 산지가 솟아 있다.
낭림산맥에서 발원한 대동강(大同江)이 시의 중앙을 관류하면서 서류하다가 황해로 유입되며, 평원군에서 발원한 보통강(普通江)이 남류하다가 대동강과 합류한다. 특히, 이 시는 대동강의 양안에 형성되어 북서안은 공격사면으로 급경사를 이루지만 남동안은 퇴적사면으로 하천에 의하여 퇴적된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평야지대는 석회암이 오랫동안 풍화, 침식되어 낮은 구릉을 이룬 카르스트준평원이다.
또한, 대동강에는 능라도(綾羅島)·양각도(羊角島)·반월도(半月島) 등의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대부분 고생대 조선계(朝鮮系)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을 이루어 석회암이 분포하며, 시의 북동부에는 평안계(平安系) 고방산통(高坊山統)에 속하는 석탄층이 편재하고 있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9.4℃, 1월평균기온 -8.1℃, 8월평균기온 24.4℃, 연강수량 924㎜이다.
[고대]
이 지역에는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는데, 상원군 흑우리의 검은모루유적이다. 한반도의 구석기문화를 입증하여 주는 유적은 이미 여러 곳에서 발견된 바 있으나, 특히 이곳은 그 시기나 규모 등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약 6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는 검은모루유적과 함께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1917년에 발굴되었던 미림리·오야리의 유적에 이어 10여 군데의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계속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풍부한 선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시대부터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과 그 도읍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정설이 없는 상태이지만, 한(漢)나라의 동방 침략정책에 밀려 멸망한 고조선의 수도가 이곳이었음은 공인되고 있다. 그 뒤 일시적으로 한나라의 동방군현 세력하에 놓여지기도 했으나, 압록강 중류에서 흥기한 고구려가 점차 국력을 남으로 확장하면서 군현 세력을 축출하게 되었고 313년(미천왕 14)에 마침내 이 지역 일대는 고구려에 영속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33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견고히 수축하여 남진정책의 근거지로 삼았다. 고구려의 이러한 정책은 북방으로의 진출을 계획했던 백제를 자극하였고, 371년에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얼마되지 않아 이 지역을 수복하였으며, 광개토왕이 이곳에 영명사(永明寺) 등 9사를 건립한 데 이어 427년(장수왕 15)에는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이후 고구려의 멸망 때까지 약 240여 년간 수도로 번성하였다. 장수왕 당시의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 동북의 안학궁(安鶴宮)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나, 그 뒤 552년(양원왕 8)에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장안성(長安城)을 축성하고 586년(평원왕 28) 왕궁을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7세기에 들면서 중국에 대통일국가가 들어서게 되자 고구려는 계속 그들의 침략을 받았다. 즉, 612년(영양왕 23)에 수나라의, 661년(보장왕 20)에는 당나라의 침공을 각각 받았으나 그때마다 많은 전과를 올리며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거듭된 외침으로 손상된 국력은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평양성이 함락당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이때 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안동도호부는 만주로 옮겨갔으며 이곳은 통일신라에 영속되었다.
[고려]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의 일이다. 태조왕건(王建)은 즉위와 함께 황해도 지방민을 이곳에 옮겨 민호를 늘리는 한편, 북진정책의 근거지로 삼고자 왕식렴(王式廉)을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삼았다가 서경(西京)으로 고치면서 개경 못지않게 축성하고 분사제(分司制)를 실시함과 아울러 국왕을 순주(巡駐)하게 하는 등의 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이곳은 풍수도참설의 뒷받침을 받아 계속해서 역대 제왕이 순주하였으며 태조나 정종은 평양 천도까지 계획한 바 있었다. 995년(성종 14)에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를 두었고, 1062년(문종 16)에는 서경기4도(西京畿四道)를 설치하였으며, 1102년(숙종 7)에 문·무반(文武班)과 5부(部)를 별도로 두게 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위치 등을 갖추게 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 정치의 변동으로 인하여 이곳이 종종 반란의 중심지가 되어 소란이 거듭되었다. 1009년(목종 12) 서경도순찰사(西京都巡察使) 강조(康兆)가 반란을 일으킨 바 있고, 1129년(인종 7)에는 묘청(妙淸) 등이 정금자주(征金自主) 정책을 표방하면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대화세(大花勢)의 땅인 평양 임원(林原)에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1135년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서경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각종 조처가 취해졌다. 즉, 관리의 수를 대폭 축소하고 서경기4도를 해체하여 6현(江東·江西·中和·順和·三登·三和)으로 개편하였으며 서경 순주제를 폐지하였다. 무신의 난이 발생하여 국정이 몹시 혼란해지자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2년여 동안 저항하다가 토벌됨으로써 이곳은 매우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
13세기에 몽골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이 지역도 그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잦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먼저 1216년(고종 3)에는 몽골군에 쫓긴 거란족이 침입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서북지방에서 노략질을 행하였으며, 1231년에 몽골의 제1차 침입이 시작되어 전화가 미치게 되었다.
이 때에 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을 점령하고 이곳에 근거를 마련하자 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를 시켜 이들을 내몰고 이곳 주민들을 해도(海島)로 이주시켰다.
몽골군은 그 뒤에도 30여 년간 계속 침입해 왔는데,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은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켜 서경을 점령하고 몽골에 부용하는 등의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결국 고려는 최씨정권이 무너지면서 1270년에 몽골과 강화를 맺었으나 사실상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몽골은 고려안무사(高麗安撫司)를 이곳에 주둔하게 하고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동녕부는 1290년(충렬왕 16) 고려에 반환되었으며 공민왕 때에 평양부(平壤府)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1359년(공민왕 8)에 다시 홍건적에게 점령되어 고난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는 그의 즉위년에 기자묘(箕子墓)에서 단군(檀君)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뒤 1429년(세종 11)에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함께 모신 숭령전(崇靈殿)을 따로 건립하였고, 기자묘를 숭인전(崇仁殿)으로 부르게 하면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태조는 1395년(태조 4) 이곳에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를 보내 서북 방면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1413년(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시 서북면을 평안도(平安道)로 개편하고 이곳을 평양부라 하여 관찰사를 두어 행정과 군사를 돌보게 하였다. 당시 평안도의 주민은 극히 소수였던 관계로 세종·세조대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지방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평안도 각지로 이주하게 하였는데, 이로써 이 지방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게 되었으며, 이를 뒤쫓던 왜군은 7개월 동안이나 이곳을 점령하고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도 후금(後金)의 점령하에 들어가 더욱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계속된 외침으로 피폐해진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영조는 1733년(영조 9)에 평양성과 도시의 일부를 수축하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이 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경승지로 서북지방의 모든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청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도 계속 늘어나 번성하였다.
[근대]
이 지역은 근대에 들어 상업 부문에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인들이 척사적(斥邪的) 성향이 강한 이남지역에 비하여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데 개방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에서 다수의 개화파 인물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양세력의 군사적 위협에 강력하게 대항하였는데. 1866년(고종 3)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이 지역은 청·일군간의 격전지가 되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895년에 실시되었던 23부(部)제에 의하여 평양부로 되었다가 1896년의 13도(道)제 실시로 평안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하여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제는 이곳에 통감부 이사청(理事廳)을 두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관찰사와 이사관을 폐하고, 도장관(道長官)을 두어 평안남도와 평양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뒤 1914년에 평양부를 다시 두어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평양부를 통괄하게 하였으며, 이때 종래 시역의 일부와 주변의 읍·면을 분리하여 대동군을 신설하였다.
1938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의 면리를 수용하면서 시역을 넓혀나갔다. 광복 이후 1946년 9월 평양부는 평안도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고, 1948년 북한정권 수립 후에 이곳은 북한의 수도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1966년에 발굴, 조사된 상원군 검은모루유적지에서는 약 60만∼4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짐승뼈화석과 석기류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청정암동굴에서도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에 이어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더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곳만 해도 미림리·오야동·토성동·사동·석암동·청호동·반교리·서포·금탄리·입석리 등 10여 군데 이상이 된다. 1959년에 발굴된 미림리 유적지에서는 상층부에서 즐문토기와 철기가, 하층부에서 무문토기와 석부·반율석도·방추차 등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역 신석기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조선의 유적으로는 평천리의 기자정전지(箕子井田址)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 역사성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에 걸친 이 지역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토성동토성과 정백동의 고분군을 들 수 있다. 토성동토성은 방형의 구조에 성벽 한 변의 길이가 200m를 훨씬 넘는데, 토성의 안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정백동의 고분군에서는 여러 종류의 청동제 그릇과 금동유물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당시의 청동주조술과 금속공예술의 탁월한 기법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정백동 이외에도 미림리·석암동 등지의 고분에서 당시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풍부하게 발견된 바 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은 통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류지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대동강 유역의 고분은 화려한 벽화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용강·강서·안악 등지의 고분벽화는 회화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며, 평양 시내에서도 사신도를 주로 그린 무진리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고구려의 왕궁·성터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동천왕 때의 일이다. 이때에 지금의 을밀대(乙密臺)와 만수대(萬壽臺)를 포함한 성벽을 이루고, 대동강변의 기린굴(麒麟窟) 부근의 영명사 남쪽에 구제궁(九梯宮)이라는 이궁(離宮)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은 유허만이 남아 있지만 일설에 구제궁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왕궁이요, 기린굴은 동명왕이 기린을 사육하던 굴이라고 전하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 있는 대성산성·장안성 등은 고구려 성곽의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대성산성은 성벽의 길이나 그 규모면에서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장안성은 552년에 축조된 것으로 지금의 평양 외성(外城)과 그 북쪽의 동천왕대에 건조되었던 구 평양성을 합하여 이루어졌다. 장안성의 내부는 田자형으로 구획을 정리하고 자갈로 도로를 정비하여 놓는 등의 정제된 형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평양성에서는 고구려 당시의 축조사실을 알게 해 주는 이두체 명석(銘石)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왕궁인 장안궁은 창광산 동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원래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할 때의 왕궁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있는 안학궁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허만 남아 있다.
광개토왕이 이 지역을 중시하면서 영명사를 비롯한 아홉 개의 사찰을 지었다. 영명사는 한때 아도(阿道)가 주석하였던 고찰로, 원래는 기린굴 위쪽에 있었던 것을 1109년(예종 4)에 기린굴 아래로 이전하였으며 부벽루(浮碧樓)는 원래 영명사 범종루(梵鐘樓)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영명사에 승장(僧將)을 두고 승군을 통솔하게 하면서 따로 총섭(總攝)을 두어 평안도의 사원과 승려를 총괄하게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병화로 소실되고 오직 칠성당(七星堂)과 팔각오층탑, 그리고 돌사자 등이 남아 있다.
497년(문자왕 6) 창건되었던 금강사(金剛寺)에는 거대한 팔각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절터에서 막새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부벽루 앞 대동강 건너편인 동대원리에도 1만여 평에 달하는 대왕사(大王寺) 사지가 있으나 역시 기와조각 등만이 발견될 뿐이고,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서 발견된 2개의 금동불상은 고구려 조각기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려시대의 서경(西京)으로 중시되었던 이 지역에는 비교적 고려의 유적이 많은 편이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중성(中城)으로 일컬어지는 재성(在城)이 축조되기 시작하였고, 938년에는 뒤에 외성(外城)으로 일컬어지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었는데, 고려시대의 평양성이라 함은 바로 이 재성과 나성을 합한 것으로 그 주위가 40여 리에 달한다.
성종 때 서경성을 수축하면서 대동문(大同門)·보통문(普通門)·경창문(景昌門)·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정양문(正陽門) 등의 여섯 대문을 건설하였다. 대동강변의 명소인 부벽루는 원래 고구려 때 남헌흥상인(南軒興上人)이 지은 영명루(永明樓)인데, 예종 때 이것을 수축하고 부벽루라 개칭하였다.
대동문은 서경성의 동문(東門)으로 조선 초기에 개축되고 다시 1575년(선조 8)에 수축된 3층 누문이며 평양의 대표적 고건축물이다. 영명사에 전하여지는 팔각오층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나부사에 있는 육각칠층탑도 이때에 만들어진 불교유물이다. 한편,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과 기자 사당인 숭인전, 그리고 기자묘 등은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되었던 유적들이다.
조선의 태종·성종대에는 고려시대의 재성인 평양 본성을 수축하였고, 병자호란 후인 인조 때 국방강화를 위하여 평양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1685년(숙종 11)에 완성하였다. 을밀대 서북에서 모란봉을 둘러싸고 있는 평양 북성은 1714년에 축성하였는데 전금문(轉錦門)이 동문이고 현무문(玄武門)은 서문이다.
만수대의 영숭전(永崇殿)은 태조이성계(李成桂)의 화상을 모신 사당이다. 또한, 을밀대 북쪽의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명나라 장병을 제사지내는 사당이고, 서문 밖의 무열사(武烈祠)는 명나라 상서(尙書)이던 석성(石星)과 이여송(李如松)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관풍동의 의열사(義烈祠)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의 사당이다.
서원으로는 용곡서원(龍谷書院)·서산서원(西山書院)·창강서원(蒼岡書院)·소현서원(紹賢書院) 등이 있었으나 거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상태이다. 대동강가 덕암(德巖) 위에 있는 연광정(鍊光亭)은 중종 때 건립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경승지로는 능라도·청류벽(淸流壁)·모란봉·을밀대 등이 있다. 양각도 부근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사건이 발생하였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채관리에는 백선행기념관이 있다. 〈李元淳〉
[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
채관리에 있는 기념관. 이 기념관은 백선행이 일생 동안 아껴 모은 돈을 희사하여 건립한 공회당이며,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였다. 본래 건립되어 있던 평양부립공회당이 일제의 전용물이 되어 분노의 대상이 되자, 이에 맞서 조만식(曺晩植)의 건의에 따라 그 뜻을 받아들여 석조 이층양식으로 건립되었다.
구조는 1층은 사무실과 도서실, 2층은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으로 되어 있다. 기념관 전면에는 백선행의 상반신 동상이 있으며, 비문은 양주동(梁柱東)이 지었다. 그 밖에 최은희(崔恩喜)가 지은 백선행의 일대기와, 숭현여학교에 건립된 백선행여사기념비문 등이 있다.
옛 교육기관으로는 고구려시대의 국학기관인 태학(太學)과 사학기관인 경당(扃堂)이 설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서경으로 불렸으며, 930년(태조 13) 학교가 설립되었다. 성종 때 개경에 국자감(國子監)의 분교식 시설이 설치되어, 지방자제들의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향학(鄕學)도 운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설립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서당이 있어서 한문도 전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교육기능이 약화되고 많은 서원들이 세워졌는데, 1564년(명종 19) 기자를 배향한 인현서원(仁賢書院), 1593년(선조 26) 석성을 배향한 무열사, 1658년(효종 9) 선우 협(鮮于浹)을 배향한 용곡서원, 1645년(인조 23) 을지문덕(乙支文德)·김양언(金良彦)을 배향한 충무사(忠武祠) 등이 설립되었다.
그 밖에 이원익(李元翼)을 배향한 오리사(梧里祠), 갈의직(褐懿直)·양택구(楊澤九)를 배향한 광산사(光山祠), 김상순(金相淳)을 배향한 소현서원 등을 비롯하여 서산서원·노계서원(蘆溪書院)·숭령전 등 32개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철폐되고 무열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개항 이후 기독교세가 왕성했던 지역으로서, 근대교육기관으로 미션스쿨이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설립되었다. 북감리회 계통으로는 1894년 광성학교(光成學校), 1896년 숭덕학교(崇德學校)·정진학교(正進學校), 1898년 맹아학교(盲啞學校) 등이, 북장로회 계통으로는 1897년 숭실학교(崇實學校), 1903년 숭의학교(崇義學校) 등이 세워졌으며 1907년 안창호(安昌浩)가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은 1895년 설립된 평양심상소학교이며, 1938년 종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은 1906년 설립된 평양고등학교이며, 뒤에 평양제2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05년 대학과정을 신설한 숭실학교는 1912년에 숭실대학으로 승격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대학교가 되었으며, 1923년 설립된 도립사범학교는 1929년 평양사범학교로 되었다.
그 밖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와 여자성경학교·여자고등성경학교·요한성경학교 등이 설립되어 유능한 교역자들을 양성하였다. 1945년 당시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8개 교, 중등학교 14개 교, 전문학교 2개 교가 있다.
종교상황은 기독교의 전파와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서, 기홀병원(紀忽病院) 및 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과 의료사업에 힘쓰는 한편, 교화와 사회계몽에 앞장섰다. 1945년 현재 불교사찰 1개, 천주교성당 3개, 개신교교회 28개, 기타 교당 3개가 있다. 그 밖에 사회복지시설로는 평양고아원·양로원·갱생원·자생원 등이 있다. 1926년 기림리에 평양공설운동장이 건설되어 주경기장을 비롯한 정구장·수영장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면적은 약 1만3000평 정도이며, 수용인원은 1만 명이다. 1918년 무오단(戊午團)과 1921년 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면서 체육계의 지도단체가 되었으며, 1925년 관서체육회로 통합하여 체육활동을 주도하였다. 공설운동장의 건설로 경성·평양의 축구대항전을 비롯하여, 함흥·평양·경성 3지역의 대항전 등 각종 경기가 이루어졌다.
[고장의 설화]
이 고장의 설화로는 먼저 고구려를 창업한 동명왕과 관련된 〈기린굴전설〉을 들 수 있다. 〈기린굴전설〉에 따르면, 동명왕이 기린마를 여기서 길렀다고 하며 왕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에 들어와서 땅 속을 통하여 조천석으로 승천한 곳이라고도 하는데, 그 흔적이 돌 위에 남아 있다. 이곳은 또 고구려시대의 가장 큰 군용자금저장창고로 전하여지고 있는데 굴 깊숙이 들어가면 그에 관한 글이 새겨진 돌벽이 있다.
〈대동강 속의 큰닻전설〉은, 홍수가 잦아서 큰 해를 입었던 평양사람들이 평양이 행주형(行舟形)이어서 대동강의 흐름에 쫓아 내려가고 있으니까 닻을 내려 배를 붙들어 매어놓아야 한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연광정 아래 강물 속에 큰 닻을 빠뜨렸는데, 그 이후로 큰 홍수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의열사전설〉은 임진왜란 때 평양을 점령한 왜장의 애첩이었던 계월향이 김응서장군을 오빠라 속이고 내통하여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의열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사당으로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평양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의구총전설〉은 절개를 지키고 있던 미모의 젊은 과부가 자신을 탐내고 침입해 온 이웃집 남자를 거절하여 죽음을 당하자 그 과부가 기르던 개가 관가에 가서 계속 짖어 사정을 알리고 범인까지 알려주어 주인의 복수를 한 뒤에 죽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마을사람들이 무덤을 만들고 비석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주암산전설〉은 술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가난하여 술을 받아드리지 못함을 늘 괴로워하던 효자가 어느 날 산에서 바위 아래 움푹 팬 곳이 술이 나오는 곳임을 알아 매일 술을 아버지에게 대접하였다는 이야기로서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하늘이 내려준 술샘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본래 성천에 있었던 능라도가 큰 비에 떠내려와서 지금의 모란봉 아래에 있게 되었으므로 성천의 관리가 평양에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는 〈능라도전설〉, 여씨(呂氏) 성을 가진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관우를 모신 〈서묘전설 西廟傳說〉 등이 있다.
관서지방 제1의 경제도시로 대동강 유역의 풍부한 임산·지하·농산 자원을 원료로 각종 산업이 발달하였다. 대동강 유역에 형성된 평양평야는 대부분 석회암지대로 테라로사 토양을 이룬다. 흙의 보수력이 강하므로 강수량이 적은 이 지역에 적합하여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며 밭농사에도 유리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조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은 양잠 등이다. 근교지역에서는 사과·채소 등의 원예농업과 축산업도 이루어진다. 특히, 평양고치는 생육조건이 적합하여 질이 우수하며, 평남지역이 주요 산지로 손꼽힌다. 평양소는 골격이 크고 내구력이 강하여 노역에 적합하고 온순한 우량우로서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광업은 석탄·석회암·금·흑연·고령토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강동·대동·강서 및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평남남부탄전은 석탄매장량이 약 3억톤에 달하며, 사동(寺洞)·삼신(三神)·삼등(三登)·만달(晩達)·강서(江西) 등의 탄전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사동·삼신 탄전은 초기에 이 지역 주민들의 가정용 연료로 채굴, 이용되었으나, 일제의 해군용 석탄으로 채굴되면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품질이 우수하고 대동강의 수운과 도로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개발되었다. 따라서, 풍부한 지하자원과 편리한 수륙교통, 화력발전에 의한 동력자원, 풍부한 공업용수와 노동력 등 공업입지조건이 유리하여, 제철·제당·제분·방직·양조·기계·시멘트·고무·요업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하여 평남공업지대의 중심지를 이룬다.
평양시는 예로부터 대구·강경과 더불어 조선의 3대시장이라 불리던 상업도시였으며, 1898년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어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중국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기지화의 식민지경제정책으로 인하여 급속하게 발달한 평남공업지대의 핵심지역으로서, 경의선이 개통되고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직교식 신시가지가 확대, 형성되었으며, 상업지구가 이루어졌다.
1920년 공설시장제를 실시하게 되자, 그 이전에는 종로 일대 상영시장(上營市場)을 중심으로 정기시장이 열려 농수산물·생활필수품·신탄 등의 거래가 있었으나, 대규모의 상설시장으로 정기시장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대표적인 공설시장으로는 신창리의 사창공설시장, 신양리의 신양공설시장, 인흥리의 인흥공설시장, 선교리의 선교공설시장 등이 있었다.
특히, 사창공설시장은 평양객주의 근거지이며, 곡물류·식료품·주단·포목·피혁·어물류·생활필수품 등의 도산매활동이 활발하여, 관서지방 경제유통의 중심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신양리의 평양가축시장은 1·6일에 개시되어 평양소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며, 평양어시장은 수산물을 거래하는 공설시장이고, 평양식량품시장은 1년에 6일만 휴장하는 상설곡물시장이다.
이러한 시장과 더불어 경제유통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상가의 상점들이다. 남문·서문·대동문·영문통(營門通)·신창리 일대의 상가는 일반 생활필수품을 취급하였으며, 일본인들의 중심 거주지였던 신시가지도 생활필수품을 취급하는 잡화상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상점으로는 평안백화점(平安百貨店)·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윤세식상점(尹世植商店)·중앙상회(中央商會)·삼광상회(三光商會) 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 유명한 상점들이 많았다. 그리고 화상(華商)의 대부분은 종로·대동문·이문리 일대를 중심으로 직물류수입판매·중국잡화·요식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인들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생활필수품을 판매하였다.
교통은 경의선이 시의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만포선(滿浦線)·평원선(平原線)·평남선(平南線)·승호리선(勝湖里線) 등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대동강역·평양역·동평양역·서평양역 등이 설치되어 있어 철도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도로는 평양∼원산 간, 평양∼진남포 간의 국도와 지방도의 도로망이 각 방면으로 뻗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또한, 대동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50t급의 작은 기선이 운항하며, 상류는 주운(舟運)이 가능하여 무연탄·목재 등의 운반에 이용된다.
이 시는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으로 명승·고적이 많은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주요 관광지로는 기림리에 모란대공원, 이문리에 대동문소공원, 산수리에 서기산공원 등이 있다. 이 일대의 대동강 절벽은 청류벽이라 일컬어지는데, 수심이 깊고 물이 맑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대동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능라도가 앞에 가로놓여 있고 멀리 중화의 많은 구릉이 바라보여 일대장관을 이룬다.
행정구역 개편내용은 평안남도 도청소재지였던 평양시가 1946년 9월평양특별시로 승격되면서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동구역·서구역·남구역·북구역 등으로 행정구역을 구성하였다.
1958년 6월 대성구역을 신설하여 6개 구역으로 개편되고, 같은 해 9월 중구역·외성구역·선교구역·서성구역·사동구역·대성구역·낙랑구역·용성구역·만경대구역·삼석구역·승호구역 등 11개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60년 10월 평안남도 강동군 일부와 대동군 일부, 순안군(1952년 신설) 일부 지역이 평양시에 편입되고 평천구역·보통강구역·모란봉구역·동대원구역·대동강구역·형제산구역·역포구역 등 7개 구역을 신설하여 18개 구역이 되었다.
1963년 5월 평안남도의 강남군·중화군·상원군(1952년 신설)이 평양시에 편입되고, 1972년 4월 순안군을 구역으로 개칭하여 19개 구역 3개 군으로 하였다가 1979년 12월 외성구역을 중구역에 통합하였고, 1983년 3월 평안남도 강동군이 평양시에 편입되었다.
1989년에는 중구역(中區域)·평천구역(平川區域)·보통강구역(普通江區域)·모란봉구역(牡丹峰區域)·서성구역(西城區域)·선교구역(船橋區域)·동대원구역(東大院區域)·대동강구역(大同江區域)·사동구역(寺洞區域)·대성구역(大城區域)·만경대구역(萬景臺區域)·형제산구역(兄弟山區域)·용성구역(龍城區域)·삼석구역(三石區域)·승호구역(勝湖區域)·역포구역(力浦區域)·낙랑구역(樂浪區域)·순안구역(順安區域), 중화군(中和郡)·강남군(江南郡)·강동군(江東郡)·상원군(祥原郡) 등 18개 구역 4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 2,629㎢, 인구 290만 명(1989년 기준)이다.
동쪽은 황해북도 연산군(신설), 평안남도 회창군(신설)·성천군, 서쪽은 남포시의 용강군·강서구역·천리마구역·대안구역, 남쪽은 황해북도 황주군·연탄군(신설), 북쪽은 평안남도 평성시(신설)와 평원군에 접한다. 이 시는 북한의 정치·경제·문화·행정·교육의 중심지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공업이며, 주요 공업은 기계공업·동력공업·건재공업 등 중공업과 다양한 경공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기계제작공업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광복 후 신설된 기계공업은 운수기계·전기기계·건설기계·탄광기계·공작기계·정밀기계·방직기계 등이며, 주요 생산품은 전기기관차·전차·윤전기계·불도저·기중기·권양기·승강기 등 건설기재와 설비 등을 생산한다.
시의 연료동력공업은 석탄공업과 전력생산인데 탄광은 삼신·강동·흑령 등 여러 개의 탄광이 있고, 1900년대에 개발된 삼신탄광은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고 전력생산은 평양화력발전소에서 하고 있다. 건재공업은 시멘트·콘크리트부재·석재·요업·금속건재·화학건재를 생산하며, 경공업으로 대표적인 것은 방직·편직·생활필수품·신발·식료공업 등이 있다. 생산제품으로는 비단·면·혼방과 나일론 등 화학생산제품이 생산된다.
농업은 주로 도시민들의 부식물인 채소생산이 대부분이다. 채소는 주로 사동구역·낙랑구역·역포구역·형제산구역·삼석구역·만경대구역·강남군 등 주변 구역과 군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곳에서의 주요 농산물은 배추·무·마늘·파·오이·호박·고추 등이다. 또한, 용성구역에는 온상재배방법이 발전하여 오이·토마토·고추 등의 각종 채소가 생산된다.
축산업은 광복 전에는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닭·오리·메추리·돼지 등을 사육하는 대규모의 사육단지가 조성되어 만경대양계장·평양돼지사육장은 현대적인 가축장으로 발전되었고, 고기·계란 등은 만경대구역·하당·서포·용성구역·역포구역·두단·중화군·강동군 등에서 주로 생산된다.
과일은 역포구역을 중심으로 평양준평원지대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사과·배·복숭아·포도·살구·밤·대추·딸기 등이 주종을 이룬다. 특히, 평양밤·덕동대추·만경대신버찌 등은 예로부터 평양 명산물로 유명하였다. 주요 농작물은 벼·옥수수·콩이고, 벼는 강남군·낙랑구역·사동구역·역포구역·만경대구역·형제산구역 일대에서 많이 생산된다. 옥수수는 상원군·강동군 등의 남동부 일대에서 많이 생산된다.
교육기관으로는 김일성종합대학·김형직사범대학·김책공업대학·기계대학·의학대학·건설건재대학·철도대학·경공업대학·영화대학·체육대학·음악무용대학·경제대학·상업대학 등이 있고, 공장대학인 평양공업대학·평천공업대학이 있다. 전문학교로는 전기·기계·화학·방직·공예·건설·의학·체육·예술·농업·기상수문·통계 등 각종 고등전문학교와 근로자들의 실습장인 인쇄고등전문학교·고등기계전문학교 등 공장전문학교가 있다. 한편, 중·고등학교는 평양제일고등중학교 등 100여 개가 있다.
각종 편의시설로는 광복 전 평양화신백화점 자리에 제일백화점을 새로 건축하였으며, 종합목욕탕인 창광원과 청류관 식당 등을 건설하였고, 1988년에는 옛날 옥류관을 증축하였다. 문화시설로는 만수대예술극장·평양대극장·인민문화궁전·교예극장·모란봉극장 및 2·8문화회관, 5월 1일 경기장 등이 광복 후 건설되었으며, 시가지 건설은 창광거리·천리마거리·문수거리·버드나무거리·낙원거리·북새거리 등을 재개발하였다.
안학궁은 중궁을 비롯하여 5개의 건축군으로 된 왕궁이었는데 지금은 궁터만 남아 있다. 평양성은 모란봉에 성의 일부와 평천구역에 성터의 일부가 남아 있다. 철도망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의선(평양∼신의주)·평부선(평양∼부산)·평라선(평양∼나진)·평남선(평양∼평남온천)·평덕선(대동강∼덕천) 등이 확장되었고, 평양∼북경 간, 평양∼모스크바 간 국제열차가 운행된다.
주요 도로는 신의주·남포·원산·개성·만포와 연결되어 있다. 시내에는 지하철도가 있으며, 대동강 연안의 운하로는 송림·남포·은율·재령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고, 최근에는 미림·봉화·남포갑문 등이 건설되어 대동강 운수가 더욱 확장, 발전되었다. 항공은 평양∼북경·평양∼모스크바 간 국제항공운수가 있고, 북한 내에서는 평양∼삼지연 간에도 운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