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

근대사
사건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 개최되었던 민중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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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만민공동회는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 개최되었던 민중 대회이다. 첫 대회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국권침탈 시도를 막기 위해 조직했지만 점차 민중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고종이 독립협회를 불법화하고 약속한 개혁안을 무산시키자 11월 5일부터는 42일간의 철야시위가 이어졌다. 고종은 지방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테러를 가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해산시켰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는 해체령을 포고했다. 민주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민중에 의한 애국운동을 정립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의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 개최되었던 민중 대회.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열강은 한국의 광산 · 철도 · 전선 · 삼림 ·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고 한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났다.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들은 갑오개혁 당시의 내각 제도를 의정부 제도로 복구시켜 국왕의 전제권 제한 조치를 풀어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켰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게 광산 · 철도 · 삼림 · 어장 등의 각종 이권을 양여하였다. 특히 열강의 이권 침탈과 깊숙한 내정 간섭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은 심각하게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러시아는 극동에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부동항과 군사 기지를 설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의 정책이 단순한 이권 침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노린 침략 간섭 정책이었으므로 일본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 영국과 미국은 이권 획득에 힘쓰면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은근히 후원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권 획득에 열중하며 영국의 견제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밀착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일단 견제하는 데 성공했으나 새로이 강화된 러시아의 침략 시도를 막고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긴급히 저지시켜야 할 처지에 당면하게 되었다.

우선 고종이 하루 속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여 자위력을 갖추고 자주 독립권을 확고히 세우며,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국민은 원하고 있었다. 비로소 1897년 2월 20일 밤 1년만에 개혁파와 자주적 수구파의 연합 세력의 노력에 의해 고종경운궁(慶雲宮)으로 환궁하였다.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0월 고종을 대군주로부터 황제로 승격,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며 대외적으로 완전 자주 독립을 재선언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한국이 전통적으로 자주 독립국이며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간섭,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의 간섭, 아관파천 이후의 러시아의 간섭과 같은 것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로 러시아는 1897년 9월 주한러시아공사를 종래의 베베르(Veber, K. I.)로부터 적극적 침략 간섭 정책을 주장해 오던 스페이에르(Speyer, A.)로 교체하였다. 본격적인 식민지 속국화의 침략 간섭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베베르에서 스페이에르로 주한러시아공사가 교체된 시기를 전후하여 당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을 시행하려 하였다. 첫째, 군사 기지 설치의 제1차 작업으로 부산 절영도(絶影島)의 석탄고기지 조차(租借)를 요구하여 왔다. 그들은 부산 · 진해 · 마산포일대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군항을 건설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둘째,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실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侍衛隊)에 러시아 사관들을 파견하여 러시아 군사 편제에 따라 편성하고 훈련시켜 러시아의 장악 하에 두려고 하였다.

러시아는 1897년 8월 3일부터 13명의 사관과 다수의 사병을 불러들였으며, 11월에는 레미노프(Reminoff)를 기기창(機器廠) 고문으로서 임명하였다. 또한 러시아는 서울에 1,000명의 러시아 육군을 상주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에 300명의 코작기병을 주둔시켜서 모두 1, 300명의 러시아군을 대한제국의 수도에 주둔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셋째,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전 재무대신서리 알렉세이예프(Alexeiev, K.)를 한국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897년 12월에는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관반민의 한러은행(The Russ · Korean Bank)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제정러시아의 이러한 침략 정책은 자주 독립의 기초를 강화하려고 하던 한국인들과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개혁 세력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결집되어 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되어 독립문 · 독립공원 · 독립관의 건립 운동과 토론회 등의 계몽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혁파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우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러시아의 침략 정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자, 러시아와 친러 수구파들은 『독립신문』을 폐간시키려 하였다.

경과 및 결과

1898년으로 접어들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 속국화 침략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제정러시아는 1월초부터 부산 절영도 조차의 인준을 다시 강력히 요구하였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1898년 1월 21일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키고 수병들을 절영도에 상륙시켰다. 대한제국을 공공연히 위협하면서 그들의 결의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열강은 서로 견제하면서도 러시아의 침략 정책에 편승하여 이권 침탈에 더욱 혈안이 되었다. 일본은 1895년에 약속한 경부철도 부설권의 인준을 공식적으로 요구해 오면서 무력 시위를 벌였으며,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도 이에 편승하여 이권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밖으로는 제정러시아의 본격적인 식민지 속국화 침략 정책의 강화와 열강의 경쟁적인 이권 침탈 요구가 자행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친러 수구파 내각이 수립되어 이에 야합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898년부터는 대한제국의 모든 부원(富源)과 자주 독립의 정신 등을 모두 잃고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질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서재필(徐載弼) · 윤치호(尹致昊) 등을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들은 2월 7일 기존 방식은 계몽운동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독립협회의 이상재(李商在) · 이건호(李建鎬) 등은 1898년 2월 21일 구국 정치 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독립협회는 외국의 군사권과 재정권 간섭을 규탄하고,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입헌정치를 주장하면서 탐관 오리의 제거와 대대적 내정 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한국의 개혁 세력과 러시아 등 외세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국권 수호와 내정 개혁의 정치 운동을 결의하였지만,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부산의 절영도 조차를 거듭 요구하여 왔다. 이것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러파의 내락을 얻은 것으로 외부대신서리 민종묵(閔種默)이 이를 허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독립관에서 통상회(通常會)를 개최하고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는 격렬한 성토 대회를 개최하고, 외부(外部)에 강경한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이에 당황한 민종묵은 사임을 청원하였으나 러시아 공사관과 친러파 정부는 오히려 민족묵을 외부대신정임(正任)으로 승진 발령하였을 뿐 아니라, 절영도 조차를 인허해주려 하였다. 이에 격분한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실력으로 저지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러시아측은 이외에도 1898년 3월 1일 한국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러은행을 서울에 개설, 업무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3월 6일 독립관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한러은행의 철거 요구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7일 한러은행이 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려 하며 자주 독립을 침해하고 있다고 규탄하는 항의문을 탁지부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는 러시아 공사관의 후원만 믿고 확실한 답변을 회피할 뿐이었다. 따라서 한러은행 문제도 역시 독립협회와 민중의 더욱 적극적인 대책이 있어야 해결되리라는 전망이 뚜렷해졌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조차된 석탄고기지도 회수할 것을 결의하고, 3월 7일 회수를 요구하는 공한을 외부(外部)에 발송하였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 정책이 독립협회의 민족 운동에 의해 전면적인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3월 7일 오후 장문의 협박 외교 문서를 대한제국 외부에 보냈다.

외교문서에서 러시아는, 무뢰배들(독립협회 회원들)이 러시아를 배반하는 것을 러시아 대황제는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데,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을 보낸 것은 한국 고종의 요청에 응한 것이므로 만일 한국 고종나 한국 정부가 러시아의 원조를 불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사관 및 고문관이 불필요하다고 보면 러시아는 이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니, 이에 대한 회답을 24시간내에 보내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던 것이다.

최후통첩을 받은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매우 당황하였다. 고종은 각 대신들과 외국공사들에게 자문을 청하는 한편, 우선 24시간의 회답 시한을 3일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러시아공사에게 발송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침략 간섭 정책을 완전히 배제할 기회가 왔다 판단하고, 즉각 정부가 러시아 사관과 고문이 불필요하다는 회답을 보내고 그들을 철수시켜 자주 독립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제정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배제하고 자주 독립을 공고히 하기로 하였다. 독립협회가 개최한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의 약 17분의 1인 1만여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였다.

민중 대회에서 시민들은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백목전(白木廛) 다락 위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성토 연설을 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제국 정부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 철수를 열망한다는 전문(電文)을 러시아 공사와 러시아 외부 대신에게 발송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연사들의 연설을 들은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1만여 명의 민중들은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환을 만민공동회의 의사로서 결의하였다. 만민공동회라는 독립협회의 새로운 민중 대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만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민공동회’라는 민중 집회는 한국사상 처음으로, 민중과 연사가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만민공동회에는 러시아 공사는 물론 다수의 외국 공사들과 외국인들이 관람하였다. 그들은 한국 민중의 성장에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고종과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압력과 러시아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연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결국 정부는 3월 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공사에게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의 철수를 요구하는 외교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에 놀란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이러한 회답을 보내면 큰일이 일어나므로 종전과 같이 러시아에 의뢰하기를 바란다는 회답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고종은 취침중이라고 만나주지 않았다.

그런데 3월 12일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서울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평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자발적으로 등단한 연사들은 러시아와 모든 외국의 간섭을 배제, 자주 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하자고 연설하였으며, 군중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가(可)’라고 환호하였다. 이것은 민중의 거대한 힘과 시민의 성장을 나타낸 것으로 정부 관료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회원들과 외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과 놀라움을 주었다.

러시아측은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회답 전문을 보내어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의 철수를 훈령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3월 19일 러시아의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을 정식으로 해고하였고, 뒤이어 한러은행도 철폐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대한 침략 간섭 정책 실행에 실패한 스페이에르를 4월 12일자로 해임하고 마튜닌(Matunine, N.)을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군사 기지를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설치하도록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도 할 수 없이 그들의 월미도 석탄고기지를 한국 정부에 돌려보내 왔다.

이로부터 한국 시위대의 군사 훈련은 한국인 장교들에 의해 현대식으로 진행되었고 황실 호위와 지방의 치안을 위한 군사 훈련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전국의 재정도 대한제국 탁지부대신의 관장하에 놓이게 되었다. 재정권과 군사권이 완전히 대한제국 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이것은 극동을 하나의 지역단위로 보는 제정러시아로서는 부산에 군항을 설치하는 것이나 랴오둥반도에 군항을 설치하는 것이 작은 차이 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대한제국으로서는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강화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반도가 완전한 힘의 진공상태로 되자 제정러시아와 일본은 상호 견제를 위해 1898년 4월 25일 로젠 · 니시협정(Rosen · Nish Agreement)을 맺어, 양국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동시에 대한제국이 군사 교관이나 재정 고문의 초빙을 요청하는 경우에도 양국의 사전 동의 없이는 응낙할 수 없도록 협약하였다.

로젠 · 니시협정에 의해 종래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맺어진 웨버 · 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 · 야마가다 협정 등은 사라지게 되어 비로소 완전한 국제 세력 균형이 이뤄지게 되었다. 세력 균형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2월까지 만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 대한제국기의 국제세력균형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만민공동회의 운동에 의한 결실이었다.

대한제국의 개혁파들은 제정러시아세력 철수 운동에 성공하자 곧 승세를 타고 친러 수구파 정부를 규탄하면서 치열한 자주 민권 자강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가 전개한 주요 운동으로, ① 서재필 추방 반대운동 ②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수호 운동 ③ 탐관오리의 규탄 ④ 러시아의 목포 · 진남포 항구 매도 요구 저지 ⑤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요구 반대 ⑥ 프랑스의 광산 이권 요구 반대 ⑦ 이권양여의 조사 ⑧ 무관학교 학생선발 부정 비판 ⑨ 의학교 설립 요구 ⑩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에 대한 일본의 배상 요구 저지와 이권 요구 반대 ⑪ 황실 호위 외인 부대 창설 저지 ⑫ 노륙법(孥戮法) 및 연좌법 부활 저지 ⑬ 7대신 규탄과 개혁 정부 수립 요구 ⑭ 민족상권수호운동고조 ⑮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수호운동 의회설립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치 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의회 설립을 요구하고 친러 수구파의 퇴진과 개혁파 정부의 수립 요구하여, 마침내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朴定陽) · 민영환(閔泳煥)의 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독립협회의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공한이나 상소가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만민공동회와 민중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립협회 주도로 열린 제1차 만민공동회 이후에는 민중들 스스로의 새로운 운동 형태를 만들어 냈다. 예컨대, 4월 30일 숭례문 앞에서 열린 서재필 재류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 6월 20일 종로에서 열린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공동회, 7월 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7월 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를 반대하고 경부 철도 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등은 독립협회와는 직접 관련 없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민중 대회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상설 기구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임 간부가 따로 없이 만민공동회가 개최될 때마다 수시로 임시 회장과 총대위원을 선출하여 민중의 결의 사항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 ·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자, 개혁파들은 신정부를 지지하고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여 의회(上院)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월 5일 한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開院)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의회설립법)를 공포하였다. 또한 개혁파들은 그들의 체제를 굳히기 위해 10월 28일∼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 등 애국적 시민들이 다함께 모인 자리에서 새로 개설될 ‘의회’를 통해 자주적 개혁 정책을 실현해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개혁파 정부는 의회 설립 하루 전인 11월 4일 밤에 붕괴되었다. 친러 수구파들은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그들은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共和政)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匿名書: 비밀 전단)를 뿌렸다.

고종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다시 조병식(趙秉式)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친러 수구파 정부를 조직하였다. 물론 친러 수구파 정부는 독립협회와 개혁파 정부의 의회설립령을 취소하였다.

1898년 11월 5일, 서울 시민들은 한국사상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관람하기 위해 독립관으로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이 때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개혁파 정부가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서울 시민들은 삽시간에 수천명이 경무청 문 앞에 모여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처음에는 임병길(林炳吉), 나중에는 고영근(高永根)을 선출하여 지도자의 체포에 항의하고 사건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번의 만민공동회는 이전과는 달리 상설기구로 성립된 것이 큰 특징이었다.

만민공동회는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 6일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 시위하였다. 고종은 병력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자, 대신 친러 수구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11월 10일 오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은 만민공동회의 6일간의 철야 시위의 간고한 투쟁 끝에 획득한 시민의 대승리였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종로로 옮겨 철야 시위를 계속하면서 ① 독립협회 복설(復設), ② 모략배의 재판, ③ 헌의6조 등의 실시를 요구하였다.

고종이 그들의 요구 조건을 승낙하지 않자 11월 15일 만민공동회를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옮겨 압력을 가중시켰다. 만민공동회 개최 13일째인 11월 18일에는 국내의 대표적 신진 지식인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의 13개 부서의 간부직을 담당하여 만민공동회는 더욱 크게 강화되었다.

독립협회를 복설시키려는 운동지 저변으로 확대되어 가자, 고종과 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황국협회(皇國協會)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 들였다. 약 2000명의 보부상들은 길영수(吉泳洙) · 홍종우(洪鍾宇)의 지휘 아래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 군사 대오를 편성하여 11월 21일 만민공동회를 기습하였다.

만민공동회의 시민들은 연 17일째 철야 시위를 하여 지쳐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보부상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난타당한 시민들은 부상자가 부지기수로 나왔으며, 만민공동회장은 삽시간에 참담한 수라장이 되고 만민공동회는 패퇴하였다.

이에 수구파와 고종은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이튿날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마포에까지 밀려가서 보부상들을 공격하였다. 시민들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수구파와 황국협회를 격렬히 규탄하였다.

서울 시내는 혁명 전야와 같이 들끓고 있었으므로 지도자들이 나와 시민을 조직하고 선동하면 시민혁명이 폭발할 형편이었다. 만민공동회는 해산의 조건으로, ① 황국협회계 인물 8명의 처벌 ② 보부상의 혁파 ③ 시민이 원하는 인재의 등용(개혁정부수립)이라는 3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고종과 수구파정부는 만민공동회의 기세와 압력에 굴복하여 3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보부상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그후 11월 23일 만민공동회는 2일간 휴회하며 실천 여부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정부가 실천하기로 약속한 3개조의 요구 사항 실시가 진전이 없자 서울 시민들은 2일 뒤인 26일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은 돈례문(敦禮門)까지 나와 만민공동회 대표와 황국협회 대표에게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줄 것을 친유하였다.

고종과 수구파는 만민공동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50명의 중추원 의관을 임명하였다.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은 17명으로, 고영근 · 윤시병(尹始炳) · 남궁 억(南宮檍) · 유맹(劉猛) · 현제창(玄濟昶) · 윤하영(尹夏榮) · 홍재기(洪在箕) · 양홍묵(梁弘默) · 정항모(鄭恒謨) · 최정덕(崔廷德) · 신해영(申海永) · 이승만(李承晩) · 어용선(魚瑢善) · 홍정후(洪正厚) · 조한우(趙漢禹) · 변하진(卞河進) · 손승용(孫承鏞) 등이었다.

비록 수구파의 지지 세력이 33명이고 만민공동회 지지 세력이 17명으로 중추원 의관수의 3분의 1에 불과하였으나 중추원을 이끌고 갈 자신이 있었으므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12월 1일 황국협회와의 쟁투 때 죽은 신기료장수 김덕구(金德九)의 만민장을 성대하게 개최하고 시위행렬을 벌였다. 이것은 만민공동회의 세력을 강화하고 시민의 지지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만민공동회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의연금이 쇄도하고, 평양에서도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지회들이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설립되었다. 그들은 고종이 12월 2일 개각 때 친러 수구파를 진출시키자 12월 6일부터 만민공동회를 재개하여 상소 운동을 전개하면서 ① 헌의6조 실시 ② 황국협회계 5명의 재판과 처벌 ③ 보부상의 혁파 등을 요구하고, 연일 국정전반을 개혁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만민공동회를 무마하기 위해 중추원의 개원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중추원은 친러 수구파에 의해 관제가 다시 바뀌어 의회의 성격은 빼고 자문기관의 성격만 남은 것이었다.

중추원이 개원하는 12월 16일 개원하는 날 만민공동회계의 의관들이 앞장서서 국정을 담당할 인물(개혁정부의 대신 후보) 11명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여 고종에게 천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무기명 투표로 선출된 11명은 민영준(閔泳駿) · 민영환 · 이중하(李重夏) · 박정양 · 한규설(韓奎卨) · 윤치호 · 김종한(金宗漢) · 박영효(朴泳孝) · 서재필 · 최익현(崔益鉉) · 윤용구(尹用求) 등이었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11명으로 강력하고 유능한 새 개혁정부를 수립하고, 불만족스러운 대로 중추원을 의회로 활용하여 사실상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키면서 대대적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독립의 기초를 확고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만민공동회의 운동과 중추원의 대신급 인물 11명의 천거에 의한 개혁 정부 수립 요구에 직면한 고종은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고종은 이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고 개혁정책에 반대하여 온 데 대한 후회하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박영효를 소환하여 우선 만민공동회를 무마하고 정치의 개혁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영기(閔泳綺) 등 수구파들이 고종을 오도하여 군대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고 주장하였다. 종로에서 계속되는 만민공동회는 중추원의 11명 천거를 인준하고 과단성 있는 박영효의 소환 기용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 중에는 박영효가 역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박영효의 천거는 시민의 만민공동회에 대한 열정적 지지를 크게 감소시켰다. 이에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서 만민공동회를 해산할 경우의 각국의 반응을 타진하였다. 러시아만 군대 사용을 권하였고 다른 공사들은 언급을 회피하였다.

이 때 일본공사 가토[加藤增雄]가 일본도 명치유신 초기에 군대로써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일본공사가 노린 것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세력의 붕괴였다.

일본측은 그들의 한국 침략 정책에 대한 한국 내의 저항 세력이 궁극적으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세력이라고 보고 이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고종은 마침내 군대동원의 결단을 내려 12월 23일 시위대에 의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수구파들은 시위대에 술을 먹이고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진격하게 하였다. 보부상까지 군대 뒤를 따라 공격하여 왔다. 만민공동회 회민은 시위대의 총검과 보부상의 몽둥이에 쫓기어 해산하였다.

12월 24일 서울시내는 한때 계엄상태하에 들어갔다. 12월 25일, 마침내 고종은 열한가지 죄목을 들어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 구금하였다.

1898년 11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고종친유 이후의 6일간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상 최장기일인 42일간 철야 시위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와 일본의 외세를 업은 고종과 친러 수구파의 무력 탄압 앞에 마침내 해산당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비록 만민공동회운동은 실패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첫째, 1898년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한반도까지 진출한 제정러시아를 랴오둥반도로 후퇴시키고 국제 세력 균형을 형성하여 유지시켰다. 이 때 획득된 세력 균형이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때까지 만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

둘째, 열강의 이권 침탈과 침략 간섭 정책을 물리침으로써 일시적이지만 한국의 자주독립을 굳건히 지키고 열강의 침략을 일단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셋째, 수많은 애국적 인사들을 근대적으로 배양하였다. 이것은 두가지 면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하나는 만민공동회운동에 참가하였던 청소년들을 그 뒤의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길러낸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주자학과 위정 척사 사상에 젖어 있던 낡은 애국적 인사들을 근대적 자주민권 자강 사상을 가진 애국적 인사로 전환시킨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은식(朴殷植) · 장지연(張志淵) · 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은 애국계몽운동가의 경우이다.

넷째, 자유민권사상, 즉 민주주의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다섯째, 민중들 사이에서 민중에 의한 애국운동의 새로운 형태를 정립하였다. 여섯째, 그 뒤의 민중에 의한 독립운동의 원동력을 양성 공급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3 · 1운동인데, 우리는 한국근대사에서 그 최초의 원형을 만민공동회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윤치호영문일기(尹致昊英文日記)』
「19세기 한국의 근대국가형성문제와 입헌공화국 수립운동」(신용하,『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1, 1986)
「독립협회의 의회주의사상과 의회설립운동」(신용하, 『한국사회의 변동과 발전』, 1985)
「독립협회 지도세력의 상징적 의식구조」(박영신,『동방학지』20, 1978)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신용하,『한국사연구』11, 1975)
집필자
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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