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관찰사, 한성은행 은행장, 남작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44년(헌종 10)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1894년 협판내무부사에 임명되어 노인정회담에 조사위원으로 참석했다. 1896년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897년 한성은행 초대 은행장에 취임했다. 이후 궁내부 철도용달회사 부사장, 광장회사 사장, 헌정연구회 회장, 광학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10년 합방찬성운동을 벌이는 정우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병합 직후 조선귀족회, 동익사, 조선유도사, 모성공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844년 6월 10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조경(祖卿)이며, 호는 유하(游霞)이다.
판서 김계진(金啓鎭)의 아들로 태어나 김경진(金敬鎭)에게 입양되었다.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숙부이며, 친일파였던 윤덕영(尹德榮)의 외사촌형이다.
조선 말기에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고, 대한제국기에는 한성은행 은행장, 함경남도관찰사,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정우회(政友會)와 대한수상(水商)조합소 총재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유도사(朝鮮儒道社) 총재, 산릉주감(山陵主監) 제조(提調), 대성원(大聖院)원장 등을 맡았으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32년 11월 13일 사망했다.
1870년 진사시, 1875년 2월 사마시, 1876년 3월 문과에 합격했다. 같은 달 홍문관 교리로 관직에 진출했다. 1879년 4월 돈녕도정(敦寧都正), 1880년 9월 사간원 대사간, 1885년 5월 성균관 대사성, 1886년 1월 예조참판, 1886년 9월 병조참판, 1887년 11월 홍문관 부제학, 1888년 4월 한성부 좌윤, 1888년 6월 예조참판, 1888년 10월 한성부 우윤, 1889년 1월 이조참판, 1890년 1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891년 10월 한성부좌윤, 1892년 1월 형조참판, 1892년 8월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893년 3월 형조참판, 1894년 4월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다가 예조참판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 6월 협판내무부사에 임명되어 일본전권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의 노인정회담에 조선측 내정개혁 조사위원으로 참석했다. 같은 달 일본의 경복궁 쿠데타 직후 성립한 김홍집 1차내각에서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1895년 3월부터 궁내부 협판으로 궁내대신 사무를 서리하다가 5월 시종원 시강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직후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의 추천으로 궁내부 협판에 복귀했다. 같은 해 10월 빈전제거(殯殿提擧)를 겸했고, 1896년 1월에는 비서원경(秘書院卿)과 전의사장(典醫司長)을 겸임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11일 궁내부 협판에서 면직했다가 바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최초의 근대은행인 조선은행 장정과 조례를 만들고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7월에는 독립협회 결성에 참여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897년 1월부터 4월까지 장례원경(掌禮院卿)을 맡다가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897년 1월 사립 한성은행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은행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사립 한성의숙(낙영학교로 개칭) 숙장(塾長)에 취임했다.
1898년 5월 궁내부 철도용달회사를 설립해 부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황해도 철도(鐵島)에 15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6월에 특방(特放)되었다. 10월 중추원 1등 의관, 11월 태의원경에 임명되었다.
1900년 1월 함경북도관찰사에 제수되어 함경북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고, 같은 해 3월 함경남도관찰사로 전임해서 1902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함경남도재판소 판사를 겸했다.
1903년 2월 한성은행이 자금 부족과 경영부실로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해 12월 한성은행 부장으로 위촉되었다.
함경남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농민봉기를 진압하지 못한 책임으로 1903년 8월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904년 1월 특별사면되어 종1품 궁내부 특진관 겸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장례원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4년 7월 한국농광회사(韓國農鑛會社) 발기인으로 취체역을 맡았다. 1905년 6월 광장회사(廣長會社) 사장, 10월 헌정연구회 회장, 한성은행주식회사 주무원(主務員) 및 부장으로 재임했다.
1906년 4월 광학사(廣學社) 사장, 5월 한성은행 감사역, 9월 대한연초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7년 3월 대동문우회 발기인,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부소장으로 위촉되었다.
1907년 5월 판돈녕사사, 8월 비서감경(秘書監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패향(沛鄕)학교 교장,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 시찰을 환영하는 신사회(紳士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1월에는 규장각 지후관(祗侯官)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의 회원, 그해 9월 기호흥학회 수원군 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3월 실업연구회가 경제연구회로 개편된 후 부총재에 선출되었고 일본관광단 단원으로 일본을 시찰하러 갔다. 같은 해 5월 농사조합소 발기인, 7월 삼성농장회사(三晟農庄會社) 총재에 위촉되었다.
1909년 7월 광산역군 구제회를 조직하고 단군 · 조선 태조 · 일본 천황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臣]의 위패봉안과 의식을 거행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고문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8월 축양회사(畜養會社), 9월 단군과 일본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위패봉안과 의식을 거행하는 신궁경의회(神宮敬義會) 고문, 11월 수상조합소 총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2월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청원서’에 경쟁하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민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0년 3월 이완용, 조중응(趙重應) 등의 주도로 합방찬성운동을 벌이는 정우회(政友會) 총재와 대한수상조합소 총재로 선임되었다.
5월 대륭어업회사를 설립하고 7월 ‘합방청원서’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의 한국평화협회 재무부 총장으로 위촉되었다. 일제가 병합 후 9월에 단체해산령을 발표할 때 정우회(政友會) 대표로 참석했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달 조선귀족관광단 일원으로 일본 각지를 시찰했고 11월에는 일본 천황에게서 주병(酒甁)을 받았다. 12월 조선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명농회(明農會)를 조직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를 조직했고, 9월 남작이사로 선출되었다. 1912년 2월 조선권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9월 설립했다. 그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2월에 정5위로 서위되었다.
1913년 4월 조선무역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해 7월 설립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산릉주감 제조를 맡았고 6월에는 국장의궤 편찬 고문에 임명되었다. 7월 동익사(東益社)를 설립해 중역을 맡았다.
1921년 조선유도사(朝鮮儒道社)를 설립해서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4월 주택구제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 선만협회(鮮滿協會)를 창립 발기하고 회장을 맡았다.
1925년 5월 유교단체 모성공회(慕聖公會) 회장으로 위촉되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산릉주감 제조에 임명되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昌福會)에서 1930년 1월 200원을 받았다.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檀君神殿奉讚會) 고문과 1932년 6월 유림단체 대성원 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편저서로 『경우궁보답수세절목(景祐宮洑畓收稅節目)』이 있다.
김종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99∼21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