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회 ()

근대사
단체
192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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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정우회는 192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이다. 1925년 치안유지법이 공포되자 일제의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가 결합하여 4단체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화요회가 주도하여 4단체합동위원회를 해체하고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정우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 6·10만세사건으로 궤멸될 위기에 놓였다가 동경의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 간부들의 참여로 활력을 되찾았다. 일월회의 주도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창립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였다.

정의
192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연원 및 변천

4개의 사회주의단체로 성립된 4단체합동위원회의 발전적 해체로 성립되었다.

1925년에 들어서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희망하는 태도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 내부의 극심한 파쟁에서 기인하였다.

같은 해 5월 일제가 「 치안유지법」(4월 공포)을 실행하자, 사회주의자들도 파벌을 초월해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은 이에 대비, 각각 자체 내에서 조직적인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 결과 먼저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가 결합, 4단체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합동위원회는 7월 합동상무위원으로 이연의(李演義) · 이충모(李忠模) · 김약수(金若水) · 이규송(李奎宋) · 박일병(朴一秉) · 김경재(金璟載) · 김찬(金燦) 등 7명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4단체합동위원회가 1926년 4월 14일 정우회로 발전적 해체를 보았던 것이다. 화요회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4단체의 합동을 또다른 강력한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에 대항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이 회의 성립으로 수많은 사회주의 단체는 정우회, 그리고 서울청년회의 사상 단체인 전진회(前進會)로 양분되었다.

1926년 6월 6 · 10만세사건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가 있었다. 이 때 이 단체를 주도하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체포된 것으로 보아, 이 단체가 제2차 조선공산당에 의해 조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검거로 인해 궤멸될 위기에 놓인 상황이었지만, 동경의 한국유학생 중심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들의 참여에 힘입어 곧 활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여름 방학으로 서울에 와 있던 일월회의 안광천(安光泉) · 하필원(河弼源)은 계속 서울에 머무르면서 이 단체를 좌파 중심의 조직으로 만드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여기에 가입, 그들의 의도대로 내부 조직을 변경하면서 동시에 동경의 일월회와도 연계를 맺었다.

정우회는 같은 해 11월 3일 경운동(慶雲洞) 회관에서 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방침을 천명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안광천 외 2명의 기초위원에 의해 선언서 초안이 작성되어 11월 15일부로 신문지상에 발표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 12월 15일 이후 약 5,000매의 선언서가 국내 및 각국 단체에 발송되었다. 이것이 바로 ‘정우회 선언’이다.

정우회선언

‘정우회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분열에서 벗어나 사상단체를 통일하고 구체적으로 전위적 운동을 행해야 한다.

둘째, 교육을 통해 대중을 조직화하고 질적 · 양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 그것을 기초로 일상투쟁을 해야 한다.

셋째, 종래에 국한되었던 경제적 투쟁에서 계급적 · 대중적 · 의식적 정치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일시적인 공동전선이 필요하다.

넷째, 이론투쟁으로 운동의 진로를 제시해야 한다.

이상의 선언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세번째의 주장으로, 이것이 곧 방향전환론(方向轉換論)이다. ‘정우회 선언’에 나타난 방향전환론의 이론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의 주장들이 있다.

종래에는 1920년대 중반에 일본사회주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이른바 ‘후쿠모토(福本)이즘’이 그 이론적 배경이라는 설이 유력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사회주의의 또다른 지도자였던 야마카와(山川均) 이론이 그 배경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서로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후쿠모토이즘’과 ‘야마카와의 방향전환론’은 ‘정우회 선언’에 그대로 수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후쿠모토이즘’에 자극, 고무되었을 뿐이다.

의의와 평가

정우회는 4단체합동위원회가 주도한 시기에는 사회주의 내부의 조직적 통일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월회가 주도한 뒤에는 ‘정우회 선언’을 통한 민족협동전선의 창립이 목표였다. 모든 사회주의 단체와 조선공산당이 ‘정우회 선언’을 지지하면서 두 진영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창립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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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幹會硏究のためのノ-ト」(梶村秀樹, 『勞動史硏究』 49,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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