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박춘도(朴春濤). 함경북도 온성 출신.
일본유학생으로 1920년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자 사원으로 입사하였다. 1920년 6월장덕수(張德秀) 등과 조선청년회의 발기인으로 활약함으로써 민족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그러나 1922년 1월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에 참여하고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거치며 사회주의로 전향하였다. 이후 화요회의 대표적인 활동가로, 1924년 2월 김찬(金燦)과 더불어 고려공산청년회의 사전조직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을 발기하였다.
그해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발기인으로서의 소임을 하였다. 한편, 조선공산당에도 참여하여 제2차조선공산당에서 야체이카(細胞) 활동을 하였다. 2차조선공산당에는 5개의 푸락치 조직이 있었는데 이 중 박일병은 사상부(思想部)의 책임자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 단체들인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는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7명의 합동상무위원을 뽑아 이를 공동 운영하였는데, 김찬·김경재(金璟載)와 더불어 화요회를 대표하여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생활과 사상은 마르크스(Marx, K.)와 레닌(Lenin, N.)보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기울어져 있었다. 1926년 2차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복역 후 시력을 잃고 정신이상에 걸렸다.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