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8월 17일 전일(全一)이 중심이 되어 이남두(李南斗)·이봉길(李鳳吉)·이정수(李正洙)·이충모(李忠模)·이극광(李極光)·김연희(金演熙) 등 7명이 발기, 서울 운니동 전일의 집에서 결성하였다. 이들은 무산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적 신사회 건설을 활동 목표로 잡았다.
산하의 압력단체로 약 20명의 급수(汲水) 조합원으로 조직된 의권단(義拳團)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 기관지 『프로레타리아』 발간 계획 도중 전일·이남두·이극광·문일현(文一鉉)·이동익(李東益) 등이 체포되는 ‘종로서사건(鍾路署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남두·이극광 등이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공산주의자와 연락을 취해 오다 서울에 잠입, 전일 등과 합작하여 이 단체를 결성한 것이라고 본 일본 경찰의 검거사건이었다. 이 때 전일은 곧 석방되었고, 이정수·김덕한(金德漢) 등은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하였다.
북풍회(北風會)의 김약수(金若水) 등은 서울청년회의 압력단체인 적박단(赤雹團)이 폭력을 행사하자 조선노동당의 산하단체인 의권단을 이용, 이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중립을 표방하고,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1925년 정초 국제공산당에서 코르뷰로를 대신해 조직한 오르그뷰로는 북풍회와 화요회(火曜會)에 이 단체를 결합시키려는 재경사회운동자간친회(在京社會運動者懇親會)를 개최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립의 위험을 느낀 서울청년회가 이 단체를 통해 북풍회·화요회에 타협을 제의하였다. 이를 각파 합동의 기회라 여기고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 개최를 주장하였지만, 화요회와 북풍회가 거절해 개최하지 못하였다.
이 단체의 김연희·이충모 등은 4월부터 북풍회·화요회·무산자동맹회와 함께 4단체합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합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7월 러시아에서 귀국한 김덕한·이정수 등이 이에 반대, 당은 4단체 합동 여부를 둘러싸고 김연희 등의 합동파와 김덕한의 비합동파로 나누어졌다. 두 파는 9월 20일을 전후해 수차례 충돌을 일으켰다. 그 뒤 비합동파는 합동파와 분열, 따로 조직되어 나갔다.
1926년 4월 4단체합동위원회가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 해체, 통합됨에 따라 합동파는 해산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연합전선 구축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이 단체는, 국내의 사회주의단체 중 당의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조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