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청년연맹 ()

근대사
단체
1926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정의
1926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연원 및 변천

1926년 12월 6일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9개단체 대표 22명이 ‘무산청년본위(無産靑年本位)’의 운동을 표방하며, 봉천성 흥경현(奉天省興京縣)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 참가한 단체는 신흥(新興)·영흥(永興)·전진(前進)·신성(新成)·용진(勇進)·진흥(進興)·대광(大光)·광명(光明)·자유(自由)청년회 등 9개 단체였다.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의회간부는 의장에 강영우(姜永祐)·조명기(趙明基), 서기에 이두성(李斗星)·차명헌(車明軒)이며, 중앙집행위원은 강경룡(姜景龍)·차명헌·이시원(李時源)·안의순(安義順)·김태룡(金泰龍)·함봉희(咸奉希)·이두성·제윤보(諸允寶)·김기선(金基善)·안광선(安光善)·이도형(李道亨)·최성준(崔成俊)·강의덕(姜義德)·김인경(金仁京)·김지화(金之華)·김도중(金道中)·김동찬(金東贊)·최인덕(崔仁德)·차병률(車炳律)이고, 검사위원은 김의항(金義恒)·박창덕(朴昌德)·김학구(金學九)·최신국(崔信國)·김기용(金基用) 등이었다.

이어 그 달 8일에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선언·강령·규약의 채택과 함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과 연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창립대회에 참가한 9개 단체 대표 22명의 연서로 발표하였다.

1928년 5월 길림성 화전현(吉林省樺甸縣)에서 정의부(正義府)외 18개 단체 대표자 39명이 모여 유일당촉성협의회를 개최하고, 유일당촉성문제를 토의하였을 때, 우파인 정의부에 가담해 좌파세력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및 북만청년총동맹과 대립하였다.

이 단체는 원래 좌경운동을 지향했으나 좌익단체로서의 노선이 선명하지 못해 결국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일부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으로 가고 일부는 우경화해 좌익진영에서 이탈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활동에서는 주로 남만주교민의 계몽에 노력하였다.

기능과 역할

남만청년연맹은 무산청년을 위주로 남만주의 각 청년운동단체를 연합해 새 사회를 건설할 역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결의한 당면사업계획을 보면, ① 남만주의 청년단체를 이 연맹에 가입하도록 하며, 청년단체가 없는 지방은 새로 조직한다. ② 재정은 각 세포단체의 의무금과 월연금(月捐金) 중에서 매 회원분 1원 50전씩을 납입해 충당한다.

③ 각 세포단체에서 노력해 오던 종래의 강습회를 한층 독려하고 문맹퇴치를 기한다. ④ 순강대(巡講隊)를 조직해 각 농촌을 순회 강연한다. ⑤ 강습용 청년독본의 편찬, ⑥ 도서 및 신문열람소의 설치, ⑦ 소년회의 조직, 금주·금연운동의 전개 등이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 4(김창순·김준엽,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집필자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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