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

언론·방송
인물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기자, 신한독립당 비서과장, 조선지광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인.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김작(金綽), 적성(赤星), 진영철(陳榮喆), 김광우(金光宇)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7월 16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황해도 황주
관련 사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기자, 신한독립당 비서과장, 조선지광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인.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필명은 김작, 적성, 진영철, 김광우 등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7월 16일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중산층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황주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19년 3월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고향에서 독립운동단체인 향촌회를 조직하였고, 요주면 신흥청년회장·대한적십자사 회계과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군비주비단에 가입한 뒤 ‘적의 관리를 그만두지 않으면 생명과 재산을 빼앗을 것’이라는 내용의 협박 문서를 황주군 영풍면장과 순사 등에게 우송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도피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독립신문』 기자와 『신한공론』 주필로 활동하였고, 1923년 신한독립당 비서과장 및 산업부장을 역임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에 속하였다. 1923년 봄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를 시찰하고 돌아오다가 하얼빈에서 검거되었다. 일본영사관 경찰에 검거된 후 취조를 받고 서울로 호송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석방 후 고향으로 내려가 황주 양성학교 교장 등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하였다. 화요회와 북풍회에 가담하였고, 『개벽』·『조선지광』·『시대일보』 등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25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에 황주 대표로 가담하였고, 그해 5월 화요회 역원 개선 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기근구제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화요회 임원으로 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가 동참한 ‘4단체합동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았다. 검거 당시 경기도 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 한양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 신흥청년동맹 회원, 신흥청년사 동인, 정우회 회원, 『조선지광』 기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만기 출옥한 이후 『삼천리』·『혜성』·『비판』 등 각종 잡지에 다양한 필명으로 사회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일시 구금된 후 석방되었다. 이후 전향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

1935년 10월 경성을 떠나 북만주로 이주하면서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부터 수차례 『삼천리』, 『만선일보』 등 신문과 잡지에 일제의 만주 경영과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37년부터 친일단체인 만주국협화회의 촉탁, 『만선일보』의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가네자와 히데오로 창씨개명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40년 7월 일본군사령부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재중 동포를 상대로 방송과 영화제작을 통하여 시국인식에 대한 선전 작업에 앞장섰다. 또한 일본총영사관, 조선총독부출장소의 하라다[原田]와 함께 민족주의 단체의 상징처럼 남아있던 흥사단 원동위원부 해체를 주도하였다. 흥사단 해체는 국외의 전향사례로 거론되면서 상하이 한인들에 대한 사상적인 선도, 중경·북미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선전공작의 소재로 적극 활용되었다.

1940년 12월 친일신문 『상해시보』를 창간하여 1942년 4월까지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남경 국민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국제무대를 상대로 일제가 추구하는 ‘동아신질서’ 건설에 협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친일단체 상해계림구락부의 기관지 『광화』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전황을 시시각각 보도하였고, 각지에서 수행중인 지원병과 비행기 등 무기헌납 사례를 소개하하는 동시에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선전하였다. 1943년 상해계림회 평의원으로 상해 지역 조선인 통제와 황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43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경재의 일제 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운동 연구』(전명혁, 선인, 2006)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6)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Ⅰ(김준엽·김창순,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
「피의자 김경재 신문조서(제2회)」(조선총독부검사, 1926.8.18)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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