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빈 ()

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승정원 동부승지, 사직서 제조, 승녕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문경(文卿)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철종 9) 12월 5일
사망 연도
1921년 9월 5일
본관
반남(潘南)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을사조약
정의
일제강점기 승정원 동부승지, 사직서 제조, 승녕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문경(文卿). 이판(吏判) 박세당(朴世堂)의 7대손, 장악정(掌樂正) 박남원(朴南源)의 증손, 예조참판 박화수(朴禾壽)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8년 한성(서울)에서 태어났다. 1874년(고종 11) 9월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다. 1875년 9월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하였고, 1881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그해 7월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홍재학의 「신사척왜상소(辛巳斥倭上疏)」를 비판하고 처벌을 주장하였다.

1882년 1월 홍문관 교리와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어 삼사의 주요 업무인 전한(典翰)의 편찬과 언론문필 등 규제·규찰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5년 2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5월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 1887년 5월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9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1890년 1월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중추부 첨지(僉知), 9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10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1891년 3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1893년 7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맡았다.

1894년 7월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서 새로 발족한 군무아문(軍務衙門)의 참의로 약 1개월간 군사행정을 총괄하였다. 1897년 중추원 의관(議官)에 임명되었고 주임(奏任) 5등에 승급하였다. 1899년 12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고 종2품관으로 승진하였다. 1900년 2월 왕실의 전례, 의식 등 왕실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4월에는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맡아 칙임 4등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궁내부 특진관을 4차례 연임하며 왕실 사무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1901년 4월 장례원 소경으로 전임되었고, 6월에 경효전 제조와 사직서 제조를 담당하였다. 1903년 2월 영희전 제조, 4월 종묘서 제조를 역임하였다. 1904년 8월 전라북도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5월 순찰사 재직시 순찰행정을 둘러싸고 정읍 부안군수와 분쟁이 생겨 평리원(平理院)의 심판을 받았으나 5개월 뒤인 10월에 사면되었다.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에 날인한 역적들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일본 사령부에 체포되어 반대 뜻을 철회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제에 순응하여 점차 일제 지배에 협력해 갔다.

1907년 8월 승녕부 부총관(副摠管) 칙임 2등과 가의(嘉義)로 승진하였다. 1907년 3월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부회장을 지냈으며, 1909년 10월 공자교회로 재편될 때 총무부장을 맡았다. 1908년 9월에는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동양협회에 가입하여 50원을 기부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에 의해 총살을 당하자 민병석(閔丙奭) 등과 함께 사죄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조약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후 경학원 부제학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및 참의로 재직하였다. 1915년 시정5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이자 특별회원 및 상의원(商議員)으로 50원을 출연하였다. 같은 해 경성신사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경성신사씨자총대(京城神社氏子總代)에 참여하였고, 1916년 11월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1921년 4월 유도진흥회 회장에 선정되었다. 일제 정책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1915년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1년 9월 5일 사망 직후 조선총독부는 박제빈에게 특별상여금 500원을 하사하였다.

박제빈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9·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99~11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역승정원일기(國譯承政院日記)』
『대동학회월보(大東學會月報)』
『반도시론(半島時論)』
『황성신문(皇城新聞)』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7(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대한제국관원이력서』(국사편찬위원회, 1972)
『朝鮮紳士大同譜』(大坦丈夫 編, 1913)
『朝鮮紳士寶鑑』(田中正剛 編, 1913)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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