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호 ()

팔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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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한성판윤, 외부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0년(고종 7) 6월 3일
사망 연도
1933년 9월 5일
본관
여흥(驪興)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춘생문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한성판윤, 외부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조부는 민태현(閔泰顯)이고, 아버지는 민치억(閔致億)이며, 민치덕(閔致悳)에게 입양되었다. 대한제국기 친미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0년 한성(서울)에서 출생하였다. 5세 무렵인 1875년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 13세 때 영어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에 부설된 동문학에서 잠시 수학하였다. 이후 1885년경 상하이[上海] 중서학원으로 유학하였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887년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888년 박정양(朴定陽)의 권유로 귀국하여 내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891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한 뒤 1894년 외무 참의, 1895년 궁내부 참서관 겸 외사과장, 1896년 외부 교섭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학부 협판과 농상공부 협판을 지냈다. 이듬해부터 1년 7개월 동안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의 주차 공사관 1등 참서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에 친미 개화파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 등과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며 일정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1895년 11월 28일 친미·친러 세력이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일으킨 ‘춘생문사건’에 연루되었다. 거사 실패 후 잠시 밀려났으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킨 뒤 정동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이어서 친미파 중심의 상승 분위기를 타고 결성된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1896년 7월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으로 선출된 뒤 근대 개혁을 위한 세력 결집과 계몽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897년 2월 영공회(英公會) 2등 전권위원을 지냈고, 1898년 10월 외부 협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농상공부 협판, 농상공부대신 사무서리를 겸직하였고, 1899년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서리를 역임하였다. 1900년 1월 학부 협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통신원 총판에 임명되어 통신기관의 정비와 우정사업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1901년 2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2년 9월부터 1907년 9월까지 육군 참장을 지냈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의 특파대사로 한국에 오자 영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훈2등 서보장을 수여하였다. 1905년 7월부터 2개월 동안 일본 시찰 사무원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6년 5월 제도국 총재, 8월에 경기도 관찰사, 11월 궁내부 특진관에 각각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규장각 지후관(祗候官)과 수학원장을 지냈다.

1908년 9월에는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동양협회에 가입하여 50원을 기부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조약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5년 9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 및 특별회원으로 참여하고 50원을 출연하였다. 1917년 친일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12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을 지냈다. 1921년 4월 28일부터 1933년 9월 5일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재임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적극 협력하였다.

1911년 1월 한국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에 한국병합기념장, 1927년 6월 욱일중광장을 받았다. 1912년 12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5위, 1918년 10월 10일 종4위, 1926년 정4위에 서위되었다.

민상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2004년 10월 29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18571호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9·19호에 해당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79~59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2004.3.22 공포) 및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2004.10.29 공포, 대통령령 제18571호)에 의거하여 2005년 5월 31일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주요 업무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국내외 자료수집 및 분석, 조사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진상규명보고서 작성 및 발간 등이었다.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현대문화사)를 발간하여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뒤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조선지배층연구』(김원모, 일조각, 1986)
『한미50년사』(문일평, 탐구당, 1975)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編, 191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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