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金宗漢) 등 거물급 재계인사들이 자본금 20만원으로 1897년 2월에 설립하였다.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업무를 주요목표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개점휴업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영업목표를 황실 및 정부재산의 관리와 금융으로 전환하고, 1903년 2월 합자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은행장에는 황실측근인 이재완(李載完), 부은행장에 김종한, 실무책임자인 우총무(右總務)에는 한상룡(韓相龍)이 취임하였다. 그 뒤 한상룡이 주동이 되어 은행실무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런데 1905년 금융공황이 닥쳐와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이해 9월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변경한 다음,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의 융자를 받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래서 발행 주식 3,000주 중에서 다이이치은행이 800주를 인수함으로써, 운영자금은 거의 전적으로 다이이치은행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뒤 저리자금으로 융자받아 고리로 대출함으로써 크게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계기로 일제의 자본과 경영인들이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나,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1906년 3월「은행조례」에 따라 주식회사 한성은행이 되었으며, 이해 10월 수원지점이 개설되었다. 1907년에는 자본금이 30만원으로 증가하였으며, 1908년 2월동막(東幕 : 현재의 서울 마포)출장소를 개설하였다.
더욱이 1910년 국권상실과 거의 동시에 한상룡이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에 취임하였으며, 1911년 1월 친일파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인수하여 일거에 자본금이 300만원으로 증자되었다.
그리고 각지에 1911년 평양지점, 1912년 대전지점, 1915년 8월 개성지점, 1917년 남대문지점, 1918년 부산지점·동경지점, 1919년 동대문지점·평양 대화정(大和町)출장소·서대문출장소 등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인들의 맹렬한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이었으며, 전무는 이완용의 조카인 한상룡이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의 대주주들이 거의 친일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금을 일시에 모두 인출해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불어닥친 1920년대의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200만원의 구제자금을 융자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1922년부터는 일본인들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었고, 그 뒤로는 그들이 전무·은행장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1928년 3월에는 발행주식 6만주 중에서 2만 8,000주를 조선식산은행이 인수함으로써 조선식산은행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일제의 민족계은행통합정책에 의해, 1941년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을 흡수·합병하였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東一銀行)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을 설립하였다.
조흥은행은 1999년 4월 충북은행과 강원은행을 합병하였으며, 2006년 4월 1일 옛 신한은행과 통합하여 (주)신한은행으로 다시 출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