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응 ()

조중응
조중응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통감부촉탁,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고위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낭전(琅田), 중협(重協)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9월 22일
사망 연도
1919년 7월 25일
본관
양주(楊州)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갑오개혁|아관파천|정미조약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조중응은 대한제국기 통감부촉탁,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0년(철종 11)에 태어나 1919년에 사망했다. 1880년 초시에 합격한 후 서북변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만주, 외몽고 등지를 답사하였다. 의화군 이강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외무아문 참의가 되었으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서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다가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과 1910년 합병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정의
대한제국기 통감부촉탁,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고위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0년 9월 22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호는 낭전(琅田), 초명은 조중협(趙重協)이다. 아버지는 조택희(趙宅熙)이다. 조선 말기에 외무아문 참의, 법부 형사국장 등을 지냈다. 대한제국기에는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과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6년(고종 3) 가숙(家塾)에서 수학한 뒤 1878년 12월 성균관 중학동재(中學東齋)에 재임(齋任)으로 뽑혀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2년간 공부하였다. 1880년 전강유생(殿講儒生)으로 경서를 진강(進講)하였으며, 2월 초시에 합격하였다. 1883년 10월 서북변계(西北邊界)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 만주 · 외몽골 등지를 답사한 뒤 1885년 4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성균관으로 돌아와 “러시아에 대비하고 일본과 친교를 해야 한다.”라는 북방남개론(北防南開論)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아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되어 6년을 보냈다. 1890년 5월 특사로 풀려나 다시 성균관에 들어갔다.

1894년 7월 의정부 전고과 주사(詮考課主事)가 되어 보통문관시험위원으로 근무하였다. 9월 일본특파대사인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외무아문 참의가 되었다. 1895년 4월 외부교섭국장에 보임되었으며, 동시에 각 항구 각국거류지 조사정리위원을 겸임하였다. 그 뒤 인천부사 · 금구군수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8월 법부 형사국장이 되었다. 9월 법률조사개정위원에 이어 10월 특별법원 판사를 겸직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되자 직책을 빼앗기고 국사범(國事犯)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고마바[駒場]농학교에서 강습을 받았고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양잠과 차 재배를 경험하고 농업기술 실험과 이론 등을 일본인 기술자로부터 전수받았으며, 또한 정치와 법률학을 수강하였다.

1906년 3월 특별 사면되어 7월 귀국하였다. 10월 통감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농사문제를 담당하면서 대한농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1월 양재건(梁在蹇) · 이인직(李人稙) · 이해조(李海朝) 등과 같이 최초의 소년잡지 『소년한반도』를 창간하였다. 1907년 2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금으로 설립한 대동학회(大東學會)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지방총무와 평의원 · 신서적(新書籍) 강사로 활동하였다. 5월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형법개정 총재를 겸임하였다. 법부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체포당한 의병장과 을사오적암살단을 종신형이나 유배형으로 처벌할 것을 상주하였다. 7월 고종의 강제퇴위에 앞장섰고 정미조약 체결에 참여해서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고종 양위에 앞장선 대가로 1907년 8월 훈2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임되었다. 10월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는 신사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환영행사를 주관하였고, 같은 목적으로 조직한 대일본(제국)황태자전하 봉영 한성부민회 고문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해 10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임시감독 궁중특별경위사무(臨時監督宮中特別警衛事務)를 맡아 황태자 이은(李垠)이 12월 강제로 일본에 유학가기 전날까지 호위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1908년 8월까지 동아개진교육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12월부터 농상공부대신 사무를 서리하고 1908년 6월 농상공부대신에 올랐다. 그해 2월 사립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장 겸 고문,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8월에는 일본 동양협회에 찬성금 100원을 기부하였다. 1909년 8월 일제의 보호통치를 선전하는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 발기인 고희준(高羲駿)에게 조속히 각지에 유세위원을 파견하라고 종용하였고, 1910년 3월에는 국시유세단에 보조금 2,000원을 주선하였다.

1909년 10월 말 ‘이등박문조례단(伊藤博文弔禮團)’의 황실과 정부대표 자격으로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 국장에 참석하였다. 11월 4일에는 장충단에서 이토를 애도하는 관민추도회를 발의해서 진행하였고,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사망 50일 기념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1910년 3월 이완용과 함께 ‘병합찬성’을 추진하는 정우회(政友會) 경비를 지원하였고, 4월 일본관광단 정부대표로 참석하였다. 1910년 8월 16일 농상공부대신으로 ‘합병조약안’과 ‘합병각서’에 찬성을 표명하고, 22일 어전회의에 참석해 가결시켰으며, 조약체결전권을 위임받아 이완용과 함께 통감 테라우치 코다로[寺內正毅] 관저에서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합병조약’을 주도하여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달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19년 7월 사망할 때까지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1월 ‘조선귀족일본관광단’을 이끌고 처와 함께 일본 주요 도시를 방문하였으며,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참여해서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았다. 12월 조선흥업합자회사 총재에 취임하였고, 이완용 ·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명농회(明農會)를 조직해서 취지서와 규칙을 발간하였다.

1911년 1월 이완용, 박제순(朴齊純)과 함께 조선의 구관습을 조사하기 위한 조선구관연구회(朝鮮舊慣硏究會)를 설립하였다. 같은 달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다. 3월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장으로 200원을 기부하였고, 오성(五星)학교 농림강습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 찬성원으로 참석하였다. 8월 일제의 조선병합 1주년을 기념해 「병합 일주년 감상」(『매일신보』 1911.8.29.)이라는 축사를 실었다. 9월 조선귀족회 창립총회에서 자작이사로 선출되었고, 경성부민회 회장으로 부민회 해산식을 거행하였다.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2월 조선상업합자회사 부총재, 7월 감약당(柑藥糖)주식회사 조선측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이완용과 함께 귀족대표로 천황 메이지 위문을 갔다가 이완용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한 후 9월에 돌아왔다. 같은 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1월 경기도 대지주회 부회장과 남부공익회(南部共益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1913년 1월 조선권업협회 발기와 조직에 참여해 부총재로 선출되었고, 예종석(芮宗錫) 등과 함께 경성유치원 창설에 참여해 3월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13년 2월 대동학회를 개칭한 공자교회(孔子敎會) 회장, 3월 납세조합장, 5월 조선의사연찬회(朝鮮醫師硏鑽會) 고문 및 찬성장, 7월 조선임업조합 보식원(普殖園) 창립총회 참석 및 간사로 위촉되었다. 8월 중앙학회 회장을 사임하였다가 이후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0월 남부위생조합이 조직되면서 조합장이 되었다.

1914년 4월 다이쇼[大正]박람회 시찰하기 위한 조선진신시찰단(朝鮮縉紳視察團)을 이끌고 도쿄에 갔고, 5월 일본 황태후 장례식에 귀족대표로 참석하였다. 7월 동래와 포항을 경유해 대구에 이르는 철도부설을 추진하는 조선경편철도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8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일본군을 위한 경성군인후원회에 기부금을 냈고 조선한방의회(朝鮮韓方醫會)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9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부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1월 일본군이 중국 칭다오[靑島]를 점령하자 전첩축하회(戰捷祝賀會) 발기인으로 참여해 회장이 되었고, 12월에는 노량진 은로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5년 1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총회에 참석해 부회장 및 상의원(商議員)이 되었고, 4월에는 특별유공회원으로 기부금을 냈다. 같은 해 3월 경기도 농사장려회 부회장, 6월 조선약학강습소 소장, 8월 가정박람회 명예회장에 선임되었다.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해서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회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11월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대정친목회 발기에 참여해 회장으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17년 4월 매일신보사 주최로 조직된 남북만주시찰단 단장으로 만주를 다녀왔다. 6월 패망한 대한제국 융희황제(순종)가 일본왕 부처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배종한 후 「안태(安泰)하신 존가(尊駕)를 봉영(奉迎)하고」(『매일신보』 1917.6.30.)라는 감회를 밝혔다. 이외에도 「조선민족의 정신 부활」(『반도시론』 1917.10.)이라는 ‘한일병합’을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 2월 불교옹호회 고문. 6월 국민비행협회 경성지부 이사, 12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1918년 1월 조선지(朝鮮紙)주식회사 창립 발기인 및 4월 감사역, 7월 조선국세(國勢)조사평의회 평의원과 한성은행 취체역에 선출되었다. 8월에는 조선구제회에 기부하였다.

1918년 12월 왕세자 이은과 일본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식이 발표되자 「동화의 좋은 모범/옛 일선관계를 재현」(『경성일보』 1918.12.7.)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국장 장의괘(葬儀掛)에 임명되었다.

조중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7·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63∼18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동암일기(東菴日記)』
『매천야록(梅泉野錄)』
『묵암비망록(默菴備忘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현대사의 이해』(이현희, 서문당, 1976)
『한국현대사연구』(이현희, 동화문화사, 1972)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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