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은 대한제국기 「혈의 누」·「치악산」·「은세계」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연극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6년 조중응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해 도쿄정치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 정식 입학해 1903년 졸업하였다. 1908년 7월 원각사가 개장하자 연극개량을 목적으로 일본시찰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원각사 대표를 맡았다. 1908년 9월 「치악산」 상편을, 11월 「은세계」를 발간했다. 이인직은 문장에서 구술체와 묘사체의 혼종을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을 선보여 주목할 만한 신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862년 7월 27일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1916년 11월 25일 사망했다. 호는 국초(菊初)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896년 조중응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해 도쿄정치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1900년 2월 관비 유학생으로 정식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하였다. 재학 시절 고마츠 미도리에게서 배웠다. 신문기자 양성에 힘을 쏟는 도쿄정치학교 방침에 따라 졸업한 뒤 1901년 11월 『미야코신문』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몽중방어」 , 「조선문학 과부의 꿈」 , 「조선인의 신년축하」 , 「설중참사」 , 「잡보 한국잡감」 , 「한국실업론」 등을 연이어 게재했다. 귀국한 뒤 1903년 5월 신문을 창립한다는 취지의 「한국신문창립취지서」 를 발표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일본 육군성 제1군사령부 소속 판임대우 통역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 동원되었다가 6월 해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공훈심사에서 일본군을 위한 통역업무에 진력을 다한 공적을 인정받아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공로갑’을 받아 은사금 80원을 받았다. 1905년 동아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06년 2월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이 되었고, 6월 손병희 · 오세창 등이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 주필로 일하면서 사회성 짙은 소설을 발표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이인직은 문장에서 구술체와 묘사체의 혼종을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을 선보여 주목할 만한 신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는 어문의 구술성과 시각성을 근대식 서사를 통해 구현하고, 전근대의 주술성에서 벗어나 근대의 합리성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서구식 문명개화론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을 담고 있는 등 비판의 여지가 많다.
1907년 7월 『만세보』가 재정적인 이유로 폐간되자 조중응의 후원으로 친일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완용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8년 3월 이완용 내각의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신병상의 이유로 사직하였다. 같은 해 7월 원각사가 개장하자 연극개량을 목적으로 일본시찰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원각사 대표를 맡았다. 9월 「치악산」 상편을 유일서관에서 발행하였고, 11월 「은세계」를 발간하였으며 1908년 대한학회찬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10월 대동학회를 계승한 공자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1월 경성 한자신문사 주최로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도회에 대한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12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밀명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이른바 ‘한국병합문제’와 관련된 일본정계와 여론동향을 정탐하였으며, 이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 미도리를 비밀리에 만나 일본과 한국의 강제병합을 모의하는 밀담을 나누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친일정객 내부의 권력 쟁탈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하는 ‘합방’을 반대하기 위해 조중응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0년 1월 유사종교인 공자교를 일본에 전파할 목적으로 지회사무소를 일본에 설치하고, 공자교회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10년 8월에도 이완용의 심복으로 고마츠 미도리를 만나 한일합병을 비밀리에 교섭하였고, 이 교섭을 토대로 테라우찌와 이완용 사이에 합병조약이 1910년 8월 16일부터 체결되기 시작하여 8월 22일 정식 조인되었다.
한일합병후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사성으로 선임되어 1916년 11월까지 재임하며 고등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경학원은 조선총독부가 성균관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총독부의 정책과 이념을 홍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기구로서 사성은 경학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이다. 1913년 2월 5일부터 1913년 6월 3일까지 「모란봉」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3년 12월부터 일제의 식민통치를 홍보 지지하는 『경학원잡지』 창간 때부터 1916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편찬주임을 겸임하여 『경학원잡지』 1~11호 편찬 겸 발행인이었다. 『경학원잡지』를 편찬하는 한편 지방순회강연을 다니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 홍보하고 전국 유림의 동향을 시찰하는 등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13년 11월 전라북도 금산군에서 강연하였고, 1914년 4월 경학원 시찰단 일원으로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8월 함경북도 등지를 시찰하며 지방 인사들과 회동하였고, 1915년 11월 함경남도 등지를 시찰하고 강연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덕치라면서 모든 분야가 발전하는 은택을 입었다고 미화하였다.
1915년 11월 10일에는 경학원 간부와 강사 18명이 일본 천황의 즉위식에 축하글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는데 천황의 덕을 극히 칭송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1916년 11월 3일에는 경학원 간부와 강사 19명이 일본 태자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는데 조선인들이 천황의 신민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1916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