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교화의 중심소임을 맡았던 유교가 서양 근대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현실에 자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기개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 운동이 일어났다.
공자의 가르침으로 세계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1898년 청나라의 캉유웨이(康有爲)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도하면서 유교를 국교화하려 하였고, 기독교의 교회조직을 본받아 1907년공교회(孔敎會)를 조직하였다.
우리나라의 유교개혁은 1909년 9월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이 조직한 대동교(大同敎)에서 비롯되었으며, 1909년 10월신기선(申箕善)·이완용(李完用)이 만든 공자교는 유림을 친일화하려는 어용단체였다.
박은식의 유교개혁운동은 양명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성리학적 배경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계몽적 성격을 띤 신문들과 관련을 가지면서 사상적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기존 유교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양명학이 주자학보다 간결하고 실용적이어서 새로운 문화 창조에 적합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박은식은 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교를 조직하여 민중교화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말 영남의 거유(巨儒)였던 이진상(李震相)의 아들 이승희(李承熙)도 국외로 망명한 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李相卨)을 만나면서 유교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서 가서 서양의 현실적인 힘을 목도한 후 유교의 개혁이 급선무임을 간파하고, 중국 동삼성에 북경 공교회의 지부로 한인공교회를 건설하여 공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승희는 교육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하여 교육을 공교의 진흥방법으로 제시하였다.
한편 1914년 이래 다섯 차례에 걸쳐 캉유웨이를 직접 만나 대동설과 공교운동의 근본이념인 금문학을 전수받은 이병헌(李炳憲)은 1919년『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을 저술하여 공자교 이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1923년 중국 공교회의 지부로서 배산서당(培山書堂)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 배양마을에 세우기도 하였다.
이병헌의 공교운동은 유교 종교화운동을 핵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규정하면서 유교는 서양의 종교가 지닌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기능까지 포함한 최고의 통합적 진리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공교를 전파하는 방법으로 교당을 세워 공자를 교조로 섬기고, 경전을 번역하여 성경으로 삼고, 교사를 선정하여 천하에 경전을 강설하는 것을 내세웠다.
공자교는 혁신적인 유교지식층의 일부로부터 동조를 받았으나, 절대다수인 보수적 유림의 반대와 유교를 사회교화기관으로 축소시키려는 일제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부닥쳐 끝내 유림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30년 이후에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