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년(숙종 37) 김수증의 조카 김창흡(金昌翕)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창흡의 서문이 있다.
6권 3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시 547수, 권3·4에 가기(家記) 12편, 기 19편, 권5에 서(書) 43편, 제문 5편, 권6에 장지(狀誌) 4편, 잡문 1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1675년(숙종 1) 송시열(宋時烈)과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되자, 성천부사를 사직하고 강원도 화천의 곡운(谷雲)으로 퇴거하여 산천을 벗하면서 주위의 자연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주로 연작(連作)이 많은데, 「성도술회(成都述懷)」·「자영희부(自瀛戱賦)」·「윤삼월초파일환화음(閏三月初八日還華陰)」·「시월망일우이율북(十月望日又移栗北)」 등의 연작시가 10편이나 된다. 시의 흐름이 고아하고, 산수를 묘사한 것은 그 진경을 보는 듯한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기는 대부분 산천을 유람한 기행문이며, 그 가운데 「풍악일기(楓嶽日記)」는 1680년 가을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고 그 아름다운 절경과 고적 등을 소개한 일기체의 기행문이다. 「곡운기(谷雲記)」·「화음동지(華陰洞志)」·「유지당기(有知堂記)」·「무명와기사(無名窩記事)」·「송풍정기(松風亭記)」 등은 곡운에 대한 기록인데, 그가 곡운을 화악산(華嶽山) 북쪽에 있다고 하여 화음동(華陰洞)이라 이름 짓고, 그 자연경관을 즐기며 계곡의 ‘곡운구곡(谷雲九曲)’과 바위에 이름을 붙이고, 정자와 누대를 세운 경위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화음동은 송시열이 만년에 강학하던 충청북도 괴산의 화양동(華陽洞)과 대조가 되는 명칭으로,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의 배청척화론(排淸斥和論)과 송시열의 북벌론(北伐論) 내지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이념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양구곡’과 상응하여 ‘곡운’ 및 ‘화음구곡’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고, 그 사상의 연원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高山九曲)」과 주희(朱熹)의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임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지당(有知堂)을 세워 제갈량(諸葛亮)의 화상과 김시습(金時習)의 친필 족자를 모셨다는 기록은 그가 대의와 충절을 높이는 의리정신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거하던 부지암(不知庵) 앞 시냇가의 바위를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인문석(人文石)으로 명명하여 음양과 천인(天人)으로 상대를 이루게 했으며, 인문석 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제2도 음정양동도(陰靜陽動圖)와 하도낙서(河圖洛書)와 복희팔괘·문왕팔괘의 3단계를 새겨 넣었다. 그는 주희의 합조산고사(閤皁山古事)를 본받아 역도(易圖)를 새긴 것이라 밝히고 있는데, 그의 사상 속에 『주역』의 비중이 크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서(書)는 박세채(朴世采)·권상하(權尙夏) 등 18인과 주고받은 서한이다. 잡문 가운데 「김승경사실(金勝京事實)」은 김승경이 병자호란 때 난을 피해 오신산(五申山)으로 들어갔다가 붙들려 여진·몽고 등에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그곳의 풍속·지리·목축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일본과 청나라의 상태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978년 김충현(金忠顯)이 영인·간행한 『곡운집』에는 권두에 김창현(金彰顯)이 쓴 해제(解題)를 비롯하여 저자의 유묵(遺墨)·인기(印記), 조세걸(曺世杰)이 그린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가 있으며, 부록으로 가사(家史)·묘표와 「곡운제영(谷雲題詠)」이라는 제목 아래 송시열의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농수정기(籠水亭記)」 등 9편이 있어, 송시열의 그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송시열이 쓴 「서김연지와유록후(書金延之臥遊錄後)」와 작자 미상의 「금석총발(金石叢跋)」을 통해 김수증이 편찬한 문헌으로 시문집인 『와유록』과 금석문을 모은 『금석총』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금석문과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