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에 완성된 필사본을 1970년 남원향교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27권 5책. 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편자는 『서경』에서 『춘추』로 이어지고, 다시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으로 이어왔던 유교 전통의 역사 기록을 계승하며, 특히 주희의 강목체(綱目體)를 편찬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역사를 정리하였다.
편자는 역사의 편찬이 ‘천도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아 대일통(大一統)을 이루는 것’으로서 만세에 감계(鑑戒)가 되어야 한다는 유교 사관을 확인하고, 『서경』·『춘추』·『자치통감강목』이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를 대의(大義)로 삼고 있음을 지적해, 우리 역사 편찬에 원칙을 삼고 있다.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檀君)으로 잡고 있으나 문헌의 입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삼국통일을 이룬 669년(문무왕 9)에서 1863(철종 14)까지 1,195년간의 기사를 편년(編年)에 따라 수록하고 있다.
범례에서 밝힌 편찬의 원칙은 연대의 표시는 우리 왕호를 기준으로 중국왕조의 연대를 위에 붙이고 외민족의 왕조(五代·遼·金·元)의 경우는 우리 연대의 아래에 붙여 차별화하였다. 조선을 침략했던 청(淸)의 연대는 붙이지 않은 사실에서 화이론(華夷論)적 입장을 관철하고 있다.
삼국이나 고려 때 폐하·태후·태자 등으로 일컬은 사실은 제거하고 주(註)에서만 남겨둔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보다 더욱 엄격하게 중화 중심의 의리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불교 숭상의 전통에 따른 연등회·팔관회나 도교의 초사(醮祀)에 관한 기록을 제거하고 있는 사실은 유교적 정통 의식을 역사 서술에까지 적용한 것이다.
사가(史家)의 논의도 중요한 것을 사씨(史氏)로 밝혀 수록하고, 문집 등에서도 성명이나 호를 밝혀 채록했으나, 삼가는 태도에서 자신의 견해를 붙이지는 않고 있다.
『동감강목』의 편찬은 한말 도학자의 역사 인식과 사관을 밝힌 모범이 되고 있으며, 송병선의 문하에서는 이 책의 편찬 원칙을 이어 우리 역사의 편찬을 보완해갔다. 고종 원년(1864)에서 경술국치(1910)에 이르는 47년간의 역사로써 1912년 김종가(金鍾嘉)가 편집한 책을 필사본으로 소장하고 있다가 1972년 남원향교가 『속동감강목』6권 1책을 발행하였다. 1931년 김재홍(金在洪)은 단군에서 통일신라 직전인 문무왕 무진(668)까지를 수록한 『동감강목전편(東鑑綱目前編)』 8권 1책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