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창간되었다. 발행소는 한성(漢城) 남서(南署) 회동(會洞:지금의 회현동) 85통 4호였다.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은 이인직(李人稙)이 맡았다.
체재는 블랭킷배판 4면으로 간행하였다. 다른 신문이 8단제를 채택하고 있을 때 이 신문은 앞서서 7단제를 채택하여 1단 59행, 1행 14자로 조판하였다. 또한, 이 신문은 국한문을 혼용하면서 한자를 잘 모르는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자 옆에 한글로 음을 달다가 1907년 3월 9일자부터 없앴다.
신문의 구독료는 1부에 1전(錢), 1개월분은 20전으로 할인하여 받았다. 같은 해 11월부터 8면으로 증면, 신문값을 1장에 5리, 1개월 30전, 1년 선납 3원으로 인상하였다.
창간사에서 “신문이란 지식을 계발하는 하나의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국제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고 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으며 정치를 지도할 수도 있을 만큼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이어서 신문사의 설립목적이 오로지 인민의 교육에 있음을 밝히고, 2천만 동포의 지식계발을 초미(焦眉)의 일로 여기고 온갖 정신을 교육 중심으로 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이 신문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강경한 논설로 계속 공격하였으며 반민족적인 행위 등을 단호히 규탄하였다.
1906년 7월 23일자에서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을 비난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4일자에서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의 비행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 신문은 1906년 7월 22일자부터 10월 10일자까지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라는 신소설을 우리 나라 신문사상 첫번째로 50회에 걸쳐 연재하는가 하면, 이어 10월 14일부터는 <귀(鬼)의 성(聲)>을 연재하는 등 다채로운 지면구성을 시도하였다.
고종황제도 이 신문을 애독하여 내탕금(內帑金: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돈)에서 1,000원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측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여 창간 1년이 지난 1907년 6월 29일 제293호로 종간호를 내었다.
이 달 30일에 “기계파손으로 정간하며 다시 발간될 시기를 알기 어렵다.”는 전단광고(傳單廣告)를 낸 뒤 속간되지 못하였다. 그 뒤 이인직이 시설 일체를 매수하여 1907년 7월 18일부터 ≪대한신문 大韓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되었다. →대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