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3년 10월 1일(음력) 서울 저동(苧洞: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統理衙門)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한 월 3회 발간된 순보로, 매월 1일자로 간행되었다.
발간경위는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문제작을 도울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귀국하여 곧 한성부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자주 궁중에 출입하면서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신문발간을 진언하였다. 그래서 1883년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해 4월 박영효가 갑자기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면서 신문 발간작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박영효의 부탁으로 신문 발 의 실무작업을 맡고 있던 유길준(兪吉濬)도 이때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급진적인 개화론자들에 의한 신문발간은 중단되었으나, 그 의지는 수구파(守舊派)의 신임을 받고 있던 온건개화론자들에 의하여 다시 이어졌다.
즉, 통리아문의 장교(掌敎)였던 김만식(金晩植)이 <통리아문장정 統理衙門章程>에 있는 “동문학(同文學)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신문보사(新聞報社)를 개설한다.”는 규정을 들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고, 1883년 8월 17일 고종은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허락하였다.
박문국의 초대 총재로는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통리아문)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로는 동 협판(同協辦) 김만식이 임명되었고, 이와 아울러 부사과 김인식(金寅植)이 신문 발간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장박(張博) · 오용묵(吳容默) · 김기준(金基駿) · 강위(姜瑋) · 주우남(朱雨南) · 현영운(玄映雲) · 정만조(鄭萬朝) · 오세창(吳世昌) 등이 각각 주사(主事:6급 공무원. 사무관 아래, 주사보 위의 직급) 또는 사사(司事)로 임명되었다.
이들 주사 및 사사가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이었다. 그 밖에도 박영효 등이 일본에서 데려온 이노우에(井上角五郎)도 주재(主宰)로 다시 고용되어 신문간행작업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9월 20일 저동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실무작업을 추진하여 창간호를 내놓았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正)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취지를 거의 달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내용은 크게 내국 기사와 각국 근사(近事)의 기사로 나누어진다. 내국기사로는 관보 · 사보(私報) · 시치탐보(市直探報)를 싣고 있으며, 각국 근사 기사로는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나 분쟁, 근대적인 군사장비나 국방방책, 개화문물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각국 근사 기사 가운데는 의회제도나 자유민권사상 등을 소개한 기사도 있으나 수적으로는 매우 적다. 관보의 경우는 주로 ≪조보≫에서 기사를 취재, 보도하였다.
각국 근사 기사는 ≪신보 申報≫ · ≪호보 滬報≫ · ≪중외신보 中外新報≫ · ≪순환보 循環報≫ 등 중국의 신문에서 주로 번역, 전재하였는데, 이들 신문 외 ≪시사신보 時事新報≫ · ≪동경일일신보 東京日日新報≫ · ≪보지신문 報知新聞≫ 등 일본의 신문과 기타 여러 나라의 신문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하였다.
관영신문의 성격을 지닌 이 신문은 발행 직후 각 관아에 배포되어 관리들이 읽게 하였으며, 관아에서는 1부당 동화(銅貨) 50문(文)을 신문값으로 박문국에 납부하였다. 이 신문은 관리 외 일반인도 구독할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박문국에 직접 구독을 신청하였고, 지방에서는 경저(京邸)에 연락하여 구독하였다.
이 신문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박문국 사옥과 활자 · 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부득이 1년 만에 종간되었으며, 그 뒤 1886년 1월 25일≪한성주보 漢城周報≫로 그 제호를 바꾸어 주간신문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비록 짧은 기간 발간되었으나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의식과 자국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문물과 지식 등을 국내에 소개하여 나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년 동안에 40여 호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창간호에서부터 제36호(1884년 10월 9일자)까지만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성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