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 Bethell, E.T.)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와 합간(合刊)으로 발행을 시작하였다. B4판의 격일간 신문으로 서울 박동(○洞)에서 발행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1·2·3·5면에 실렸다.
편집인은 배설, 총무는 양기탁(梁起鐸), 주필은 박은식(朴殷植)이 맡았고, 김(金)·유(兪)·이(李) 등의 성을 가진 기자가 있었다(이름은 미상).
제1면과 제5면에는 주로 광고를 실었고, 제2면에는 사설과 해설 등을, 제3면에는 외신을 실었는데, 구독료는 1개월분이 2원50전, 1년분이 25원이었다.
그뒤 1905년 8월 11일 이국인에게 한국의 사정과 일제의 만행을 좀더 자세히 알리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간행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일제 통감부는 1906년 12월 12일≪서울프레스 The Seoul Press≫를 창간하여 대항하게 하였다.
1908년 5월 27일 영국인 만함(萬咸, Marnham,A.W.)이 발행인이 되면서 논설번역을 정태제(鄭泰濟)가 맡고 잡보 번역은 이균(李0x9577)·황의성(黃義性) 등이 맡았다.
당시 보급부수는 463부로, 서울에서 120부, 지방에서 280부, 외국에서 63부를 구독하였다. 정확한 종간일자는 알 수 없으나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가 1910년 8월 28일까지 발행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