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석농(石儂).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 나수연(羅壽淵)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여 널리 독립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독립협회에 가입, 계몽운동의 하나로 채택된 각종 토론회를 지도하였으며, 11월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하였다.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후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한 직후, 장지연(張志淵)이 1905년 11월 18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을사조약을 폭로, 규탄하는 유명한 논설을 쓸 때, 너무 격분하여 끝을 맺지 못하자 유근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도록 인쇄하여 배달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지연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장지연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였고, 해산 후에는 1907년 11월에 권동진(權東鎭) · 남궁억 ·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하였다.
또한, 1907년 4월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양기탁(梁起鐸) · 안창호(安昌浩)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 · 출판 · 교육 부분에서 활동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 · 김교헌(金敎獻) 등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 장지연 · 김교헌과 함께 국학 관계 고문헌의 출판사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나철(羅喆) · 오기호(吳基鎬) · 김교헌 등이 단군교(檀君敎)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단군교와의 관계는 말년까지 계속되었는데, 특히 1917년 2대 교주로 취임한 김교헌이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뒤 포교 활동과 아울러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서울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강우(姜虞) 등의 간부진과 교무를 전담하여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황성신문』 등 모든 한국인의 신문을 폐간하자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의 민족운동을 지도하다가 1917년 박중화(朴重華) · 안재홍(安在鴻) · 김성수(金性洙) 등 130여 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에 개최된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하고, ‘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참가,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는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 ·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