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협회 ()

대한협회 회보
대한협회 회보
근대사
단체
1907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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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에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이다.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된 후, 이토 히로부미의 허락을 얻어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 등을 추가하여 조직하였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에 있었고, 회원은 약 5,000명이었으며, 전국에 37개 지회가 있었다. 1908년에 기사 스케고로[志賀祐五?]가 고문으로 선출되면서 협회의 성격이 크게 변하였다. 특히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정의
1907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
개설

1906년 창립되어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삼고 계몽운동에 앞장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 투쟁하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내락을 얻어 1907년 11월 10일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대한자강회가 해산된 지 겨우 3개월 만에 그 구성과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대한협회가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한국의 배일적인 지식인들을 한 단체로 규합하고 회유하여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반일투쟁에의 참여를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塔洞)에 있었고, 회원은 약 5,000명이었으며, 평양 · 대구 · 진주 등 37개 지회가 있었다. 총재에 민영휘(閔泳徽)가 선출되었으나 취임을 사양하여 공석으로 있었고, 회장 장박(張博)도 취임을 사양하여 남궁억(南宮檍)이 되었다. 부회장에 오세창, 총무에 윤효정, 평의원으로 장지연 · 권동진 · 유근(柳瑾) · 정교(鄭喬) · 이종일(李鍾一) 등 23명, 찬의원(贊議員)으로 지석영(池錫永) · 김중환(金重煥) · 정봉시(鄭鳳時) 등 10명, 그밖에 감사원 · 회계 · 서기 등이 있었고, 교육부장에 여병현(呂炳鉉), 회보발행소장에 홍필주(洪弼周), 편집 겸 발행인에 이종일이었다.

1908년 7월 남궁억의 사임으로 김가진(金嘉鎭)이 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인 기사 스케고로[志賀祐五郎]가 고문으로 선출되면서 협회의 성격도 크게 변하였다.

설립목적

대한 협회의 강령을 보면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과 권리, 의무, 책임, 복종의 사상을 고취”라는 7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결국 이 협회는 국가의 부강,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추구하였는데 국가는 개인의 모임이며, 개인은 분자이니 양자가 합심하여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위하여 국민의 거국적인 협조로 정치 · 교육 · 산업을 강구하여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관인,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 · 의무 · 책임 · 복종 등 국민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활동에서 주권수호 등의 정치활동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조직활동의 강화, 월보간행, 회관건립사업의 추진, 인권옹호 등이 있었으나, 때로는 항일 · 친일의 모호한 성격도 나타났다.

기능과 역할

부서로는 교육 · 법률 · 재무 · 실업 · 지방부 등 5부를 두었고, 부서별 활동은 비교적 활발하였으며, 세율의 교정, 재산피탈사건의 조사, 강연회 등을 통해서 국민의 권리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이와같은 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신리강구소(伸理講究所)를 설치, 토호의 탐학금지와 부당함 등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국민을 지도 · 계몽하였다.

또한, 회보를 통하여 정치 · 사상 · 역사 등을 밝혔으며, 각 부서의 활동을 통하여 『대한지지(大韓地誌)』 · 『외교약사(外交略史)』 · 세계지리 · 문예 등을 광범위하게 취급하여 교양 · 계몽에 힘썼다. 그리고 회의 지도이념과 사회교화를 위하여 실천행동의 지표로서 3덕(德) · 5계(誡) · 6적(的) · 8의무를 추진하였으며, 1908년 4월부터 매월 회보를 발행하여 국민들을 지도, 계몽하였으나, 경비 부족으로 통권 12호로 종간한 뒤 신문으로 바꾸었다. 회보는 매월 2,000부 이상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 일본 · 미국에까지 보급하였다. 이와 같이, 창립 당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항일운동을 강력 추진하였으나 점차 그 성격이 변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09년의 시국에 관한 견해는 통감부의 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비판, 거부하지 못하고 점진적인 시정개선이나 건의를 하였다. 특히, 항일 의병투쟁을 지방 소요로 규정하고 그 진압을 지금의 급선무라고 하였다. 이전에도 의병투쟁의 정신을 찬성하는 듯 하면서도 방법에 대하여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창립취지와 비교해볼 때 그 성격이 크게 변화한 것이다.

대한자강회의 강력한 항일운동을 이어받고 민족진영을 대표하기 위하여 조직한 정치단체로서의 대한협회는 이용구(李容九)에게 이용당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제휴하였다. 일반회원들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1909년 9월 두 단체는 서로 협력하여 친일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두 단체는 이해관계로 완전히 연합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일본인 고문의 농간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단체는 본래 의도하였던 주권수호 등의 정치적 활동은 수행하지 못하고 1910년 국권상실 후 해체되었다. 기관지로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와 『대한공보(大韓公(共)報)』의 개칭인 『대한민보(大韓民報)』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일제의 보호정치를 한국에 대한 문명지도로 인식하고, 보호조약은 한국의 문명부강이 되면 자연 취소되면서 국권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견해는 국권회복이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력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실력양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본의 한국지배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문명개화론의 입장에서 실력양성론을 수용한 대한협회의 현실인식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매우 불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말 자강운동론과 그 각 계열」(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대한협회의 자강독립론」(김항구, 『한국교원대학교수논총』7·2, 1991)
「대한협회의 애국사상」(유영렬,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설립(設立)과 조직(組織)」(김항구,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논총(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論叢)』, 신서원, 1989)
「학회(學會)의 활동(活動)」(이현종, 『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77)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관(關)한 연구(硏究)」(이현종, 『아세아연구(亞細亞硏究)』 13·3, 1970)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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