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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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동학의 일파인 시천교를 창립한 종교창시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대유(大有), 해산(海山), 지암(智菴), 봉암(鳳菴), 우필(愚弼), 상옥(祥玉), 상옥(相玉), 상옥(尙玉), 만식(萬植), 성순(聖順)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8년(고종 5) 1월 21일
사망 연도
1912년 5월 22일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
관련 사건
동학농민전쟁|일진회|을사조약|한일병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용구는 대한제국기 동학의 일파인 시천교를 창립한 종교창시자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8년(고종 5)에 태어나 1912년에 사망했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다. 손병희를 따라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손병희의 지령을 받아 귀국하여 포교활동을 벌였다. 1904년에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조직한 진보회를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와 통합하였다. 손병희가 귀국하여 천도교로 개칭하고 동학과 일진회를 분리하자 시천교를 창설하였다. 의병 진압을 위한 자위단 조직과 합방청원운동 등 적극적인 매국 행위를 자행하였다.

정의
대한제국기 동학의 일파인 시천교를 창립한 종교창시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8년 1월 21일 경상도 상주에서 출생했다.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이다. 동학교인으로서 도호는 지암(智菴)이고, 시천교 교주로서 도호는 봉암(鳳菴)이다. 초명은 우필(愚弼)이고, 뒤에 상옥(祥玉, 相玉, 尙玉) · 만식(萬植) · 성순(聖順)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아들이 1938년 11월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를 조직한 이석규(李碩奎)다. 대한제국기에 광무학교 교장, 일진회(一進會) 회장, 시천교 교주 등으로 활동했다. 1912년 5월 22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孫秉熙) 등과 함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3년 충청도 보은에서 열린 동학 집회에 참석했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에서 충청도 청주에서 기포(起包)하여 호서군(湖西軍)으로 합세했다. 1898년 1월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사형을 면하고 출옥되었다. 최시형이 처형된 후 제3세 교주가 된 손병희를 따라 1901년 3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3년 손병희의 지령을 받아 귀국하여 포교활동을 벌였다.

1904년 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각지에 산재한 동학교도 세력규합에 힘썼다. 12월 진보회를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에 통합해 13도 총회장으로 취임했다. 1905년 5월 일진회가 설립한 광무학교 교장을 겸했고, 6월부터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을 돕기 위해 일진회원을 동원해 북진수송대(北進輸送隊)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러시아군을 정탐하며 일본군 이동을 위한 철도부설 등을 맡았다. 9월 일진회 지방총장이 되었다.

같은해 11월 5일 을사조약 체결에 앞서 송병준과 함께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 발표를 주도했고, 12월 22일 윤시병(尹始炳)의 뒤를 이어 일진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1905년 12월 1일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며 동학을 일진회와 분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여, 1906년 9월 천도교에서 이용구를 포함한 62명을 출교(黜敎)하자 11월 시천교를 창설하고 교주가 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 문제가 불거지자 송병준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는데 앞장서서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궁궐 밖에서 시위하도록 하였다. 7월 고종 강제양위와 8월 군대해산이 진행되며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격렬해지자, 그해 9월 일진회 특별총회에서 의병진압의 당위성을 강조한 「거의선언서(擧義宣言書)」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도록 노력했다. 11월 일진회원이 의병토벌에 나서는 것을 독려하기 위한 자위단원호회(自衛團援護會)를 만들어 순회총부장을 맡아 전국 순회를 하며 일진회원이 자위단을 조직하도록 했다.

그해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9년 12월 “한일 양국이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진회합방성명서」를 작성하여 순종, 통감부, 내각에 상주하고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했다. 이후 일진회가 앞장서서 ‘합방청원운동’을 벌이며 적극적인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될 때 강제 병합에 앞장선 공로로 해산비 5,000원과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1912년 4월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용구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 · 6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92∼60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말 사회단체사 논고』(조항래, 형설출판사, 1972)
『한국독립운동사』1(국사편찬위원회, 1965)
『천도교창건사』(이돈화, 천도교 중앙종리원, 1933)
『李容九の生涯』(大東國男, 1961)
『日韓合邦秘史』(葛生能久 編, 黑龍會, 1930)
『朝鮮倂合史』(釋尾東邦, 1923)
『日韓倂合始末』(內田良平·武田範之, 19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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