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해산은 1907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사건이다.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 퇴위와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였다. 고종 퇴위를 반대하는 군중 시위에 일부 무장군인들이 합류하자 일제는 군대 해산을 서둘렀다. 7월 31일 밤중에 조정을 위협하여 군대 해산에 대한 황제의 칙령을 반포하게 한 후 그 다음날 해산식을 거행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진압되었다.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뜻하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해산된 각지의 군인이 의병부대에 참가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킨 다음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차관임명권 등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조약의 부속 밀약으로 ‘한일협약규정 실행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군비의 정리’ 항목에서 “장차 징병법을 시행하여 보다 정예한 새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현 군대를 정리하여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취해 온 침략 행위였다. 원래 대한제국의 무력은 침략자의 의도에 따라 편성되고 훈련된 식민지 군대의 성격이 짙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외래의 침략으로부터 국토와 국권을 수호하는 목적과는 달리 침략자에 종속되어 그들의 침략적 도구로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친일매국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동포들의 애국 운동을 내란이라는 죄목으로 진압하는 매국적 소임을 청부맡은 폭력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적 성격을 가진 군대 내부에서도 서서히 애국적 민족 의식이 싹트고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이래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 각 지방의 진위대들은 그들 장교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거나 의병 부대와 조우하였을 때 교전을 회피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07년 7월 19일 고종 퇴위를 반대하는 맹렬한 군중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종로에는 전동의 병영을 뛰쳐나온 100명 가량의 제1연대 제3대대 소속 무장 군인들이 시위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과 교전으로 다수의 일본 경찰과 10여 명의 일본 상인들을 살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미 대한제국의 군대가 식민지 군대의 제약을 벗어나 민족적 이해에 눈을 뜬 애국적 군대로 탈바꿈하여, 일제의 하수인으로서의 무력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저항 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전동 시위 제1연대 제3대대의 봉기에 놀란 일본군은 즉시 본국에 연락하여, 제12여단의 전투부대를 대구 · 평양을 위시한 전국 중요 지구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국에 주둔하고 있던 13사단을 서울에 집결시키는 한편, 인천에 구축함 3척을 정박시키고 한국 연안에 제2함대를 초계시켜 7월 31일까지 한국군 해산을 위한 일본군의 병력 배치를 완료하였다.
그런 다음 7월 31일 밤중에 우리 조정을 위협하여 군대 해산에 대한 황제의 칙령을 반포하게 하는 동시에 군대해산 시에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한국군의 봉기를 철저히 진압하여 줄 것을 이완용(李完用)의 이름으로 통감 이토(伊藤博文)에게 의뢰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 다음날인 8월 1일 오전 8시에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사병들에게는 훈련원에서 도수교련(徒手敎練)을 한다고 속이고 각 부대 장교와 일본 교관의 인솔 아래 맨손으로 훈련원에 모이게 하였다.
종로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명성이 높았던 제1연대 제3대대와 평소 배일 부대(排日部隊)로 지목되던 임재덕(林在德) 휘하의 제2연대 제3대대도 집합하였다. 그러나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불참하여 전령이 동분서주하는 사이 남대문 쪽에서 총성이 들려오자 서둘러 해산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병사들에게는 몇 푼의 지폐를 지급하였는데, 이를 받은 병사들은 그제야 사태의 진실을 깨닫고 절치통분하였으나 이미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한 몸인데다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부대가 훈련원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어서 속수무책이었다. 일본군은 이와 유사한 기만적 방법을 사용하여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북청 진위대를 끝으로 지방 진위대를 모두 해산시켰다.
일제의 막대한 무력 투입과 친일매국정부의 배신행위로 군대 해산은 용의주도하게 강행되었으나 첫날부터 완강한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남대문과 창의문 일대에서 벌어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저항은 한국 군인들의 항일 투쟁 중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이 항쟁의 직접적 동기는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이었다. 극히 미세한 자극만으로도 항일 투쟁에 목숨을 바칠 만큼 민족 의식이 성장한 병사들을 거느린 장교들의 소임은 이럴 때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무기를 해제하고 훈련원에 가려고 영문을 나서려던 장병들은 대대장 자살을 신호로 일제히 무기고를 부수고 그들을 인솔하던 일본 교관에게 총부리를 돌리며 봉기하였다.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기관포로 무장한 일본군 제51연대 소속 3개 대대 병력이 투입되었고, 이를 맞아 한국군은 병영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펴고 무려 4시간 이상이나 장렬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적인 항일 투쟁은 지방 진위대의 해산 시에도 나타났다. 원주 진위 대장 홍우형(洪祐馨)은 부하 병사들이 항일 봉기에 나설 것을 종용하자 겁을 먹고 도망하였다가 일본군을 인솔하고 자기 부대를 진압, 해산하려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같은 진위대 특무 장교 민긍호(閔肯鎬)는 부대의 전 병사 250명을 지도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후 관동(關東) 의병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강화 진위대는 서울로부터의 해산 소식을 듣고 강화의 자강회(自强會) 회원과 협력하여 유명규(劉明奎) · 연기우(延基羽) · 지홍윤(池弘允) 등이 중심이 되어 장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하고 악명 높은 일진회(一進會)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총살하였으며, 이후 해서지방과 경기지방 의병의 중추가 되었다.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뜻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의병 전쟁이 종래와는 다른 양상으로 확대 전개되었기 때문에 항일민족해방투쟁사상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전국 각지의 진위대 해산군이 의병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의병 활동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고, 둘째 하급 병사 출신의 의병장이 종래의 유생 의병장과 교체되어 의병 대열의 성격이 변화하였으며, 셋째 해산 군인의 작전 지휘로 의병 전쟁의 전투 기술이 향상되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는 점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참가함으로써 이때로부터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