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자는 순경(舜卿), 이명은 신돌석(申乭錫)·신태홍(申泰洪)·신태을(申泰乙)·신대호(申大浩). ‘태백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다.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 아버지는 신석주(申錫柱)이다.
신돌석이 태어난 영해 지방은 1871년(고종 8)에 이필제(李弼濟)가 중심이 되어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불태운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곳으로 봉건체제에 항거하는 기질이 강한 지방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신돌석은 어려서부터 반봉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일제의 침략으로 강렬한 항일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고종 33) 3월 13일영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켰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재개되자 1906년 3월 13일 의병 100여 명을 모아 신돌석이 사는 마을에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재차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에 울진 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습격해 항복을 받았다. 이어 삼척·강릉·양양·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그들의 전선 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 울진 매화당(梅花堂)에서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모집,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원구(元邱)에 진을 쳤을 때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었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청부역(靑鳧驛)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민 3,000여 명이 가세하자, 영양의 주실[注谷]로 퇴각하는 주둔병을 추격해 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청하(淸河)로부터 영덕의 조현(鳥峴)에 이르러 적과 싸워 이기고 소항(所項)을 지나 대동(大洞)에 이르렀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12월에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 들었다.
이 때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현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호(鎭護)와 부서 개편에서 신돌석 부대는 제외되고 말았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을 비롯하여 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을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신돌석은 부하 장병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로 되돌아와 1908년 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2월에 영양읍에 진을 쳤다가, 3월에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군세를 강화해 춘양(春陽)·황지(黃池)·소봉동(小鳳洞)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4월에는 울진 도곡(道谷)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에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싸웠다. 10월에 안동 재산(才山)으로부터 영양 검정여점(黔丁旅店)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져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장병을 돌려보낸 후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했는데,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신돌석은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신돌석의 의병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양반과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봉건적인 신분질서 관념은 평민출신인 신돌석을 백안시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지도자 간의 이념적인 차이는 의병부대간의 통일전선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고, 평민 출신 의병장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