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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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제도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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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
개설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립되자 훈련대를 해산하고, 9월에 육군편제강령을 반포하였다. 이 강령에 의해 육군은 서울 수비를 위한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로 재편되었다.

내용

처음에 전주와 평양에 각 1개 대대의 진위대를 배치하여 참령 이승원(李承遠)을 전주진위대 대대장에 임명하면서 대대적인 개편이 시작되었다. 1개 대대가 2개 중대로 편제되었다.

대대본부에 대대장으로 참령 1인, 향관(餉官)으로 1등군사(一等軍司) 혹은 2·3등군사 1인, 부관으로 부위(副尉) 1인, 무기주관(武器主管)으로 참위(參尉) 1인을 두었다. 1개 중대에는 중대장인 정위(正尉) 1인, 소대장인 부참위(副參尉) 3인, 정교(正校) 1인, 부참교(副參校) 15인, 병졸 200인으로 1개 중대 병력은 220명이었다.

1개 대대의 병력은 500명 이하였다. 그 뒤 구식군대로 조직되었던 지방대를 흡수, 지방 요지 중심의 진위대로 점차 통합하였다. 즉, 1900년 7월 원수부의 명으로 진위대와 지방대를 합쳐 전국의 진위대 조직을 6개 연대로 재편하였다. 9월에 완성된 편제는 다음과 같다.

제1연대의 본부는 강화이며, 제1대대 강화, 제2대대 인천, 제3대대는 황주에서 개성으로 옮겨 설치되었다. 제2연대의 본부는 수원이며, 제1대대 수원, 제2대대 청주, 제3대대는 전주에 설치되었다. 제3연대의 본부는 대구이며, 제1대대 대구, 제2대대는 진남에서 진주로, 제3대대는 울산에서 경주로 옮겨 설치되었다.

제4연대의 본부는 평양이며, 1개 대대만으로 구성되었다. 제5연대의 본부는 북청이며, 제1대대 덕원, 제2대대 북청, 제3대대는 경성에 두었다. 제6연대의 본부는 의주이며, 제1대대 의주, 제2대대 강계로서 본래 제4연대에 속하였다.

이 밖에 제주진위대대가 증설되었다. 진위대 1개 대대의 병력은 대대장 이하 장교 및 하사관이 108명, 병졸이 900명이었다. 1개 연대가 3,000여 명으로 편제되어 있으므로 당시 지방군은 약 2만명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이러한 개혁은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한 대한제국의 자립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1905년 4월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감축하였다.

이러한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이 4개 중대로 개편된 것으로, 1개 중대 병력이 불과 장교 이하 256명으로 8개 중대를 모두 합쳐도 3,000명이 못되었다. 그 뒤 일제는 1907년 8월을 기해 중앙의 시위대를 해산하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진위대도 해산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8월 1일 시위대 해산령과 더불어 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항의 순절한 후 시위대와 일본군 사이에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3시간 동안 일대 접전이 있었다. 해산 소문이 퍼지자, 진위대 군사들은 오히려 무장하고 병영을 점령, 파견된 일본군과 접전하면서 점차 기존의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8월 5일 원주진위대, 8월 9일 수원진위대 강화분견소의 봉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해산군의 활약으로 의병진의 병력과 전술이 발전,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진위대 출신 의병장으로는 민용호(閔龍鎬)·김덕제(金德濟)·이동휘(李東輝)·유명규(劉明奎) 등이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군사(軍史)』 5(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2)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민족운동총서, 민족문화협회, 1980)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Ⅰ(송병기 외, 국회도서관, 1970)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3(국사편찬위원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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