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연봉렬(延奉烈)·연기호(延基浩). 경기도 삭녕 출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로 있다가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진위대 부교인 지홍윤(池弘允)이 갑곶(甲串)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깨뜨리고 합류하여 덕물포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증원한 일본군의 강화부 공격으로 패하였다.
다시 의병 60여 명을 소모(召募)한 뒤 동한창의대장(東韓倡義大將)이 되어 연천·적성·삭녕·마전(麻田)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姜基東)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