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수민(金守民). 경기도 장단 출신.
농민으로 일찍이 동학운동 때 농민군에 가담하여 동학당으로 지목을 받았다. 1907년에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8월 고향인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병력이 300명에 이르자 개성군 대흥산 창고에 보관중이던 정부 소유의 대포 39문과 소포 150문을 빼앗아 무장하였다. 이후 13도총도독이 되어 의병 2,000명을 거느리고 장단군 덕음동에 웅거하였다. 김수민은 이 곳에 군량을 비축하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원근의 적정을 밀탐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의병들의 복장은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하여 입도록 하였으며, 군용으로 충당되는 양곡과 의복은 부호들로부터 징발하여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였다. 용감하고 화약과 탄환을 스스로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므로 의병장 중에서도 유명하였다. 또한 전술에도 능하여 의병부대가 교묘히 이합집산을 하여 각지에 출몰하면서 기습적으로 공격, 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08년에는 허위(許蔿)·이은찬(李殷瓚) 등의 임진강 의병연합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때 20명에서 30명 정도의 병력으로 유격대를 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4월 16일에는 구화장(九化場) 일본 헌병분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이 병기와 탄약으로 무장을 재정비한 뒤 장단·풍덕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맹위를 떨치다가 점차 남하, 10월 상순에는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이 용산에서 급파된 증원군과 합세하여 공격하자,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던 약 100명의 의병으로 접근해 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강화부로 쫓아 버렸다. 일본군은 다시 용산·개성·해주·연안 등지에 증원군을 청해, 11월 26일부터 대대적인 의병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의 유격대원들은 보란 듯이 강화부 남쪽의 정두동(亭頭洞)과 산문동(山門洞) 등지에서 그들을 공격, 타격을 입힌 뒤 배를 타고 황해도와 주변 도서로 이동하는 날렵함을 보였다. 강화도기습작전을 끝낸 뒤 보다 적극적인 항일전을 기도할 목적으로 서울에 잠입, 인력거꾼 노릇을 하며 적정을 탐지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