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언찬(諺瓚)·헌찬(憲瓚).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더불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산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소모(召募)한 뒤,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구재과 같이 나흘간 간청하여 응낙을 받아내고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모집에 진력하였는데, 원근에서 응모자가 날로 늘어갔다.
그 뒤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砥平)·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규합에 진력하는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띄워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 이인영을 원수부십삼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으로 추대하고 중군이 되었다.
의병연합부대는 곧 진격을 개시하여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작전계획에 차질이 초래되어 서울침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양근·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유역에서 허위(許蔿)와 손을 잡고 재차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 방면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1908년 말 허위와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자, 의병부대는 수가 적은 곳은 수 십명, 많은 곳은 200명 내외 규모로 나뉘어져, 양주·포천·영평·연천·삭녕·금천·배천·연안을 잇는 선내 및 해상도서에서 유격전술을 펼쳐 전과를 거뒀다. 또한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909년 1월 초순에 일본군의 압력이 심해지자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남방의 연안 도서지방으로 이동하였다. 1월 19일 야음을 틈 타 2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평도 일본군파견대를 기습공격하고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같은 해 2월 27일 3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주군 석우리 북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의병 또한 수 십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래서 간도로 들어가 정병을 양성한 뒤 보다 적극적인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박노천(朴魯天)과 신좌균(申左均)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서울로 유인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3월 31일 서울에 잠입하여 용산역에 나타났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