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민란은 1862년(철종 13)에 경상도 단성현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환곡의 폐단이었다. 단성현에서 아전들이 가로 챈 환곡을 회수했으나 모두 솔가지나 짚·풀·겨 등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고 분노한 단성의 유력 세력인 김령과 난민이 관아에 갔다가 난타당하고 쫓겨났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김령은 단성현 주민들을 집결시켜 봉기했다. 이들은 이방 집에 불을 지르고 현감을 잡아 곤욕을 치르게 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이 단성에 와서 김령을 잡아 가두고서야 평정되었다. 임술민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환곡(還穀)의 폐해에 있었다. 단성현은 호수가 수천에 불과한 소읍인데도 환곡의 총수가 10만 3000여섬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아전들이 포흠한 환곡[吏逋]이 5만 2392섬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대 현감들은 이에 대한 폐단 구제책은 강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농민을 침탈하였다. 거기에 아전들이 농간까지 부려 환곡은 단성현민들의 뼈에 사무친 폐단이 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단성 농민들은 전결(田結)의 세율을 정액 이상으로 징수하는 도결(都結)과, 자기 고을의 환곡을 팔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싸게 사서 채우는 이무(移貿) 등으로 침탈당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861년 겨울 아전들이 포흠한 환곡 2만 7000섬을 회수했는데, 그것이 모두 솔가지나 짚 · 풀 · 겨 등으로 채워진 거짓 곡식들이었다.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이 이것을 보고 아전들을 관정(官庭)에 잡아들여 그것을 씹어먹게 하니, 그 소문이 온 고을에 퍼졌다.
기껏 거두어들였다는 포환(逋還)이 이 지경인 것을 듣고 분격한 전 정언(正言) 김인섭(金麟燮)의 아버지 김령(金欞)은 2월 4일 관정에 난입해 현감을 핍박하면서 꾸짖었다. 이에 관속들은 난민을 구타하며 몰아내었는데, 이 때 김령 부자도 난타당하고 쫓겨났다.
더욱 분격한 주민들은 이방과 창색(倉色)의 집으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다시 객사(客舍)로 들어가 회곡(會哭)하다가 읍외장터에 물러나 둔치고 각처의 부유한 사람에게 주식을 공급하게 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해산하지 않았다.
이에 현감 임병묵(林昺默)은 몸을 피해 감영으로 달아나다가 중도에서 두 차례나 잡혀 곤욕을 치른 뒤 상경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곧 파출되고, 이원정(李源鼎)이 새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한편, 읍론(邑論)을 주창하면서 단성민의 봉기를 주동한 김령은 집에 형구까지 갖추고서 주민들에게 사형(私刑)을 가해오던 단성의 유력한 무단토호(武斷土豪)였다.
그래서 거사를 위해 주민을 집결시킬 때도 그는 참석 여부를 일일이 점검하였다. 이 때 불참한 자에게는 궐전(闕錢) 5냥씩을 징수해 2,000냥이나 거두고, 거사 뒤에도 거사비용으로 결(結)당 1냥씩을 징수해 1,200여냥을 거두고는 약간의 비용을 제외하고 자신이 차지하는 횡포를 보였다.
그리고 일전에 관속들에게 구타당하고 쫓겨난 앙갚음으로 그들을 모두 쫓아내고 관속을 새로 차출하는 등 신임현감의 정사까지도 일일이 조종, 농단하였다. 당시 진주에는 박규수(朴珪壽)가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사태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단성에는 안핵사가 파견되지 않아 진주에서 50리 거리에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행정이 김령을 중심으로 한 난민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암행어사 이인명이 처음에는 관문(關文)을 보내어 김령을 잡아 가두려 하였다. 그러나, 김령이 관문을 찢고 진교(鎭校)를 쫓아버렸으므로 몸소 단성에 이르러 그를 잡아 가두고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아들 김인섭은 의금부에 갇혀서 형문(刑問)을 받았으나, 끝내 억울함을 호소해 결국 방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