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에 회수하던 구휼 제도였다. 평시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비축곡이었고, 흉년에는 진휼곡으로서 기능하였다. 환곡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손실분을 보전하기 위해 대여곡의 10%를 이자로 받는 제도가 시행되었고, 뒤이어 모곡의 10%를 회록하여 경비에 사용하는 방식이 관행화되었다. 그 결과 환곡은 중앙과 지방 관청의 주요 재정원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환곡 운영이 점차 부세적 성격으로 변화하는 요인이었다. 환곡 제도의 변질은 19세기 중반 민란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환곡은 춘궁기 곡식을 대여해 주고, 추수기에 회수하는 대민 구휼 제도였다. 환곡은 환자(還上)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환자는 조선 초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법전을 비롯하여 정부 문서에서 사용하던 공식 명칭이었다.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의 당대 지식인들도 저술 제목에 환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8세기 초반까지 조정에서는 환자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지만, 영조 재위 기간을 기점으로 환곡이 더 많이 쓰이게 된다. 환자의 대부분이 곡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환곡이라 한 것이다. 삼정(三政)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에는 공채(公債) 또는 조적(糶糴)이라고도 일컬었다.
빈한한 농민을 구제하고 농업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마련된 제도이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비축곡을 개색(改色)하기 위한 목적을 겸하였다. 17세기 전반 모곡(耗穀)의 10%를 회록(會錄)하는 규정이 시행되면서 재정 보충을 위한 식리적(殖利的) 기능도 갖게 되었다.
환곡 제도의 시원은 194년(고구려 고국천왕 16년)에 제정, 실시된 진대법(賑貸法)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이러한 춘대 추수(春貸秋收)의 제도나 이를 위한 국가 비축곡이 환자 또는 환곡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 때로 생각된다. 성종은 986년(성종 5)에 태조 때 설치된 흑창(黑倉)을 확장, 정비해 의창(義倉)이라 개칭하고, 국가 비축곡의 대여 · 회수뿐 아니라 진제(賑濟)도 담당하게 하였다. 나아가 993년(성종 12)에는 황금 1,000냥(兩)을 기금으로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곡물의 매출(糶) · 매입(糴)을 통한 물가 안정과 비축 미곡이나 마포(麻布)의 개색을 담당하게 하였다.
11세기 말부터 전개된 고려 귀족들의 토지 겸병은 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오면서 포환과 진제를 날로 증대시켜, 의창의 원곡을 더 이상 국곡에서만 보충하기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2세기 이후로는 의창 원곡을 확충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023년(현종 14)에 잠시 시행된 연호수미법(煙戶收米法)을 수시로 시행하였다. 나아가 충선왕 때에는 유비창(有備倉)의 설치와 함께 이를 정례화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고려의 환곡 및 조적의 제도, 곧 의창과 상평창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의 원활한 운영과 민심의 수습, 또 당시 긴장감이 고조되었던 변경(邊境)의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서 군자곡의 확보 · 증대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1413년(태종 13)에는 군자곡을 비롯한 각종 국곡이 357만 섬으로 집계될 정도로 비축되어 갔다. 그러한 속에서도 한때는 고려의 연호수미법을 개정, 실시해서(1406년, 태종 6) 전직 · 현직 관리와 전토를 지닌 민호로부터 가호당 1∼10말씩의 미곡을 징수해 의창의 원곡을 확충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고려 후기 파탄 지경에 이르렀던 환곡의 운영은 점차 정상화되어 갔다. 포환과 진제로 인한 원곡의 감축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상회하는 국곡의 보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사전 개혁(私田改革: 1389∼1391)으로 인해 소농민층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포환과 진제 수량이 감소한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중엽부터 다시 전개된 양반 세가들의 토지 겸병은 또다시 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오면서 점차 의창의 운영을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환곡의 운영에도 변동을 가져왔다. 우선 군자감(軍資監: 한성부와 그 城 아래 10里 지역의 환곡 담당)과 수령(당해 군 · 현의 환곡 담당)에게 일임된 환곡의 대여가 관찰사와 호조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받도록 통제되었다. 뒤이어 대여 대상을 토지 소유자나 친척이 있는 근착자(根着者)로 제한하고 그 양도 가족의 수와 농사의 손실에 따라 적당히 조절하였다. 나아가 환곡을 미곡으로 상환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광목 · 베 · 구리 등으로도 대신 상환하게 하였고, 1445년(세종 27)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물품을 먼저 납부해야만 그에 상응하는 환곡을 지급하였다.
한편, 세종 초부터 끈질기게 거론되던 취모법(取耗法)은 1423년(세종 5) · 1424년(세종 6)에만 잠시 실시되었을 뿐 유보된 상태였다. 그런데 1448년(세종 30)에 의창 보유곡의 2배를 보충하고도 의창의 운영이 곤란하게 되자 , 1457년(세조 3)에 군자곡에 한해서 1섬에 6말씩을 취식(取息)해 환곡 결손과 지방 관아의 경비에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 조처는 뒷날 의창의 폐지와 함께 그 명분이 작서모(雀鼠耗)로 바뀌어 1말 5되로 감소되지만, 군자곡 이외의 환곡에서도 모두 취식하게 되어 환곡 운영에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의창 운영에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면서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주자(朱子)의 사창제(社倉制) 실시가 거론되었다. 면(面) 단위에 주로 소재한 각 향사(鄕社)에 사창을 설립하고 경내의 주민들에게 미곡을 출연해 주민 스스로가 진제와 환자를 운영하되, 환곡 회수 시에는 1섬에 3되를 취식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무엇보다도 원곡의 확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해 왔다. 그러던 중 1444년(세종 26) 원곡을 국가에서 한동안 대여해 주는 조건으로 실시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수 시에 1섬당 3말을 취식해 대여받은 국곡을 상환하는 사항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어 시행하지 못하다가, 1448년(세종 30)에 경상도 대구군(大丘郡)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그해 5월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사창사의(社倉事宜)를 만들고, 군내에 13개 사창을 설립,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가 매우 좋아 1451년(문종 1)부터 세조 때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의창은 점차 폐지되면서 그 보유곡 중 사창과 상평창에 대여하고 남는 것을 호조 산하에 신설된 별창(別倉)으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별창은 군자창과 마찬가지로 이를 대여, 취식(1섬에 1말 5되)하면서 개색(改色), 비축하였다. 그런데 사창이 전국적으로 설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폐해를 드러내어 폐지되자(1470), 그 잔여곡까지 이관받은 별창은 군자창과 함께 환곡을 전담하는 주무 기구로 변모하였다.
환곡은 저축한 곡식의 자연적인 감소분을 보충하기 위해 대여곡의 10%를 모곡으로 받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환곡에 모곡이 징수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 시기부터이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모곡의 일부를 장부에 기록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당시에는 호조에 저축한 곡식이 부족하여 기민을 구제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 백성의 부담이 늘고 폐단이 많아질 수 있다는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록은 막을 수 없었고, 1642년(인조 20)경에는 이미 회록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조정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록법의 시행은 환곡의 운영과 성격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이때부터 환곡은 군자곡과 진휼곡의 성격을 넘어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주요 재원이 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환곡의 설치 목적이 하나는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재원'이고, 다른 하나는 '모곡을 취하여 비용에 보태는 것'이라고 정의할 만큼 재정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른바 취모보용(取耗補用)이 공식화된 것이다.
대부분의 환곡이 재정에 기여하고 있었지만, 호조곡과 상진곡은 사직(社稷) · 산천(山川)에 드리는 제사 · 상격(賞格) · 휼전(恤典) · 지공(支供) · 늠료(廩料) 등과 같이 다양하고 일상적인 경비에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두 환곡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는 말까지도 나올 정도였다. 환곡의 재정적 활용이 시작되자 경비난에 허덕이던 중앙의 여러 관서 · 군영(軍營)들과 지방의 영(營) · 진(鎭) · 부(府) · 역(驛)들도 다투어 환곡을 설치하고 취모보용(取耗補用)에 나섰다. 재정난에 몰리던 정부에서도 재정 보충책의 하나로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는 〈표 1〉 · 〈표 2〉와 같이 1,000만 섬에 달하는 환곡이 여러 관청에 의해 각양각이하게 운영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경비를 적지 않게 보조하게 되었다.
관서명(官署名) | 진분조(盡分條) | 반분조(半分條) | 이류일분조(二留一分條) | 계(計) |
---|---|---|---|---|
선혜청(宣惠廳) | 4,160.04 | 105,865.09 | 150.09 | 110,175.07 |
상진청(常賑廳) | 169,622.06 | 2,321,770.10 | 16,395.07 | 2,507,488.08 |
균역청(均役廳) | 232,901.06 | 275,476.12 | 3,066.00 | 511,444.03(1) |
비변사(備邊司) | 582,661.09 | 1,369,525.02 | 349,291.00 | 2,438,714.09(2) |
호조(戶曹) | 35,179.01 | 726,338.14 | 6,383.12 | 7,933,495.12 |
병조(兵曹) | 27,543.13 | ― | ― | 27,543.13 |
형조(刑曹(한성(漢城))) | 892.06 | ― | ― | 892.06 |
사복시(司僕寺) | 1,599.03 | ― | ― | 1,599.03 |
주자소(鑄字所) | 14,704.06 | ― | ― | 14,704.06 |
장용청(壯勇廳) | 359,788.01 | ― | ― | 359,788.01 |
총융청(摠戎廳) | 4,205.12 | ― | ― | 4,205.12 |
수어청(守禦廳) | 4,118.00 | ― | ― | 4,188.00 |
수원부(水原府) | 20,765.07 | ― | ― | 20,765.07 |
개성부(開城府) | 20,652.08 | ― | ― | 20,652.08 |
강화부(江華府) | 8,016.00 | ― | ― | 8,016.00 |
광주부(廣州府) | 12,974.01 | ― | ― | 12,974.01 |
감영(監營(합(合))) | 1,770,585.14 | 15,679.02 | 652.05 | 1,786,917.06 |
통영(統 營) | 193,793.04 | 80,751.06 | ― | 274,544.10 |
병 · 수영(兵 · 水營(합(合))) | 121,906.11 | 305.09 | ― | 122,212.05 |
방영(防營(합(合))) | 13,446.04 | ― | ― | 13,446.04 |
읍 · 진역(邑 · 鎭 驛(합(合))) | 46,331.05 | ― | ― | 46,331.05 |
회외(會外(합(合))) | 88,240.00 | ― | ― | 88,240.00 |
기타(其他) | 17,583.09 | 42,240.06 | ― | 101,546.10(3) |
계 | 3,751,667.06 | 4,937,917.09 | 372,942.05 | 9,269,777.13 |
〈표 1〉 정조 21년의 관서별 환곡 총수 (단위: 石, 斗) | ||||
*주 : (1)은 일류이분조(一留二分條) 503.02와 일류삼분조(一留三分條) 136,733.11을 합(合)한 수량임. (2)는 정식분급조(定式分給條) 28,291.00을 합(合)한 수량임. (3)은 정식분급조(定式分給條) 41,722.10을 합(合)한 수량임. |
도명 | 구분 | 대출액 | 수입[取耗]액 | 지출액 |
---|---|---|---|---|
경기(京畿) | 진분(盡分) | 260,866.00 | 26,086.09 | 17,563.08 |
반분(半分) | 120,349.13 | 12,035.00 | 14,726.10 | |
충청(忠淸) | 진분(盡分) | 350,320.04 | 35,312.00 | 20,976.06 |
반분(半分) | 211,992.05 | 21,199.04 | 32,376.02 | |
2-1 | 2,390.00 | 239.00 | 191.12 | |
1-2 | 335.06 | 33.08 | 33.08 | |
전라(全羅) | 진분(盡分) | 722,913.11 | 74,291.06 | 58,695.10 |
반분(半分) | 554,103.04 | 54,683.10 | 40,161.09 | |
2-1 | 4,673.08 | 467.05 | 80.00 | |
경상(慶尙) | 진분(盡分) | 727,611.05 | 71,896.09 | 67,934.04 |
반분(半分) | 677,033.02 | 68,300.08 | 47,546.13 | |
2-1 | 39,510.00 | 3,928.12 | 3,535.06 | |
강화(江華) | 진분(盡分) | 100,930.07 | 10,093.01 | 9,497.09 |
반분(半分) | 71,811.08 | 7,181.02 | 15,714.03 | |
1- 3 | 102,550.04 | 10,255.00 | 10,047.10 | |
황해(黃海) | 진분(盡分) | 313,166.03 | 31,265.03 | 28,043.10 |
반분(半分) | 311,321.05 | 30,735.04 | 22,899.03 | |
함경(咸鏡) | 진분(盡分) | 497,647.09 | 60,511.04 | 37,967.14 |
반분(半分) | 307,179.13 | 42,845.00 | 29,924.03 | |
2-1 | 62,778.06 | 3,138.14 | 453.03 | |
평안(平安) | 진분(盡分) | 740,579.02 | 75,242.14 | 65,619.10 |
반분(半分) | 391,637.04 | 75,991.08 | 76,869.00 | |
2-1 | 14,962.03 | 997.07 | 1,233.12 | |
수원부(水原府) | 반분(半分) | 21,102.03 | (除耗糴耀) | |
개성부(開城府) | 진분(盡分) | 10,722.05 | 1,068.04 | 993.08 |
반분(半分) | 15,119.04 | 1,198.03 | 1,295.00 | |
정분(定分) | 18,328.00 | 1,832.12 | 2,703.12 | |
강화부(江華府) | 진분(盡分) | 10,053.11 | 1,005.05 | 990.05 |
반분(半分) | 2,201.00 | 220.02 | 205.02 | |
광주부(廣州府) | 진분(盡分) | 11,433.04 | 1,134.06 | 1,094.09 |
반분(半分) | 2,188.10 | 1,108.13 | 614.13 | |
정분(定分) | 21,777.06 | 2,819.11 | 2,175.12 | |
진분(盡分) | 3,746,154.04 | 387,907.01 | 309,377.02 | |
반분(半分) | 2,686,039.10 | 315,408.07 | 282,332.11 | |
계 | 2-1 | 124,314.01 | 8,771.08 | 5,494.02 |
1-2 | 335.06 | 330.8 | 33.08 | |
1- 3 | 102,550.04 | 10,255.00 | 10,047.10 | |
정분(定分) | 40,105.06 | 4,652.08 | 4,897.09 | |
총계(總計) | 6,699,499.02 | 727,028.02 | 612,164.13 | |
〈표 2〉 정조 21년의 지역별 환곡 총수 (단위: 석(石), 두(斗)) |
환곡이 중앙과 지방 재정에 중요한 재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문제점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환곡의 본래 목적이 진휼에 있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 기민 구휼에 곡식을 사용하고 나면 재정에 기여할 여유분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각 관청에서는 이미 환곡으로 지출하던 경비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결국 원곡이라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정약용(丁若鏞)이 “국가 재용의 절반은 부세(賦稅)에 의존하고, 나머지 절반은 환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환곡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별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여러 지역에서 환곡의 원곡이 바닥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해마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강제적 대여와 취식이 불가피했다. 환곡의 부세적 성격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었다.
환곡 제도의 성격이 변질되어 감에 따라 환곡의 분급 · 회수 방법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분급에 있어서는 우선 반류 반분(半留半分)의 관례, 즉 진휼과 개색을 위해 보유 원곡의 반만 분급하고 반은 창고에 남겨 두는 전통적인 관례가 점차 허물어져 갔다. 환곡이 새로이 개설될 때마다 사정에 따라 진분(盡分), 일류 삼분(一留三分), 일류 이분(一留二分), 이류 일분(二留一分), 정식 분급(定式分給) 등 반류 반분 이외의 분급 방법이 다양하게 책정되었다. 하지만 환곡 운영의 일선 책임자인 수령들이 이를 어기고 수시로 가분(加分)과 별환(別還)을 시행하면서 진분과 다름없는 분급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와 함께 통수(統首)를 매개로 하는 오가작통(五家作統) 단위의 통환(統還)이나, 호수(戶首)를 매개로 하는 4∼8결 작부(作夫)의 결환(結還)과 같은 분급 방법이 널리 행해지기도 하였다. 환곡의 수량이 이를 받는 농가의 수보다 많은[還多民少] 실정 속에서 환곡을 모두 분급하기 위해서는 분등(分等)에 따른 가호별 분급보다는 이(里) · 통(統) 단위나 전결 작부 단위의 분급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취식과 회수에 있어서도 인징(隣徵) · 족징(族徵)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급 방법에서는 회수 방법도 도납(都納)과 대봉(代捧)을 널리 도입하게 되었다. 통환과 결환의 유행에 따라 회수도 공동납의 형태〔도납〕로 바뀌었고, 또 전화(錢貨)의 유통에 따라 수납이 작전(作錢)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환곡의 원곡이나 모곡(耗穀)이 더 이상 국가 비축곡의 개색이나 진제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8세기 중반 지역에 따라 원곡이 바닥나면서 새로운 분급 방식이 등장하였는데, 이른바 전환(錢還)이 그것이다. 전환은 말그대로 동전을 활용한 환곡 운영이었다. 본래 환곡은 비축곡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곡식을 분급하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었지만, 원곡이 바닥난 상태에서 곡식을 분급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동전을 분급하고 가을에 쌀을 징수하여 원곡을 채우는 방식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정부에서는 전환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지하였지만, 이미 환곡의 재정적 역할이 확고해진 상태에서 지방 관청의 전환 시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전환은 곡식 없이도 취모보용이 가능하다는 점 외에도 지방관에게 중요한 이점이 있었다. 환곡의 모곡은 10%에 불과했지만, 전환은 그보다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춘궁기와 추수기의 쌀값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가격을 적용하여 전환을 한다 해도 농민에게는 시세 차로 인한 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방 관청에서는 대부분 봄과 가을의 시세를 임의로 조정하여 더 큰 이익을 얻었다. 전환은 19세기 삼정의 문란에서 환곡이 가장 큰 문제로 부상하였던 핵심 요인이 되었다.
환곡은 전세나 대동미의 수납과 같이 모곡 이외에 낙조(落租) · 간색(看色) · 인정(人情) 등의 수수료를 붙여 수납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었다. 나아가 정퇴(停退)분에 대해서는 모곡을 복리(複利)로 수납하는 모상첨모(耗上添耗)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수령들이 매년 일정한 액수를 관계 기관에 회록해야 했던 상황에서 나온 조처라고도 볼 수 있으나, 모곡을 담당하는 농민으로서는 이른바 채전(債錢: 이자율 20%)을 넘어 갑리(甲利: 이자율 50%)에 다다르는 이자를 부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였다.
진휼과 비축을 목적으로 설행되었던 환곡 제도는 19세기 이후 부세적(賦稅的)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고, 고리대(高利貸) 제도로 혹평될 만큼 성격이 변질되었다. 따라서 폐해도 매우 커서 개혁의 소리가 높아 갔지만, 국가 재정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유 때문에 쉽사리 단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62년(철종 13)의 이른바 ‘임술민란’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모곡의 징수와 함께 취모보용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실류곡(實留穀) 236만여 섬 가운데 150만 섬을 항류곡(恒留穀)으로 만들어 흉년에 대비하게 하고, 그 개색에도 모곡의 부과를 금하였다. 대신 종래 취모보용하던 경비는 줄일 수 있는 대로 줄여서 전결로부터 추가 징수하게 하니, 이것이 곧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에서 취한 파환귀결(罷還歸結)의 대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곧 환곡 운영에 커다란 제약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전결세의 증가에 따른 저항도 가져 왔다. 그리하여 1866년(고종 3)에는 국가의 출연으로 사창 제도를 다시 실시하고, 1섬에 1말 5되를 취식하며 주민 스스로가 환곡을 운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갑오개혁 때 사환 조례(社還條例: 탁지부령 제3호)로 한층 정비되어 사환(社還) 또는 사환미법(社還米法)으로 불리며 운영되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