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호’라는 말은 18세기까지 ‘생활 형편이 넉넉한 집’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는 주로 권력이나 특권으로부터 배제된 채 관리들과 권세가들의 불법과 무단 앞에 노출되어 침탈받는 부호들을 지칭해서 요호라고 했다. 요호라는 새로운 지칭이 부세 수취 문제와 연계되어 의미가 바뀐 것이다. 이는 양반 · 양인 · 천민으로 구별하는 전통적 신분 체계가 변화된 경제 관계를 설명하고 구획하는 데 알맞지 못한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 후기 요호층은 어느 정도의 재산은 소유하였지만, 소유한 재산에 상응하는 권력이나 사회적 특권으로부터는 배제된 자들이었다. 그래서 부패한 관리나 문란한 제도 운용으로 인해 경제적인 침탈을 당하는 일이 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농사 기술의 개량, 개간을 통한 경작지의 확대, 그리고 농업 경영상의 변화를 통해 생산력의 향상을 꾀해 갔다. 이 변화 과정에서, 특히 17세기 무렵부터 적극적인 생산 활동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특권 신분층이 아닌 서민들이었으며, 자작농이나 지주로 성장해 갔다. 농업의 변화에 수반해 상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성장한 상인층, 그리고 광산업자, 일부 공시인(貢市人)이나 주인, 저리(邸吏)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산을 축적해 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또 사회 통제가 혼란한 틈에 편승하여 치부한 향리 등 하급 관리들도 나타났다. 이들은 생산력 발달 혹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비교적 손쉽게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성장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적 특권, 권력층과 연결된 배경, 재산을 이용한 뇌물 등에 의거하지 않고는 사회적 지위나 권리, 재산을 적절히 유지하거나 보호받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회 관계하에 처해 있던 자들을 요호라고 불렀다.
요호의 실상은 사료들 가운데서 다양한 형태로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초엽 정약용(丁若鏞)은 흉년에 기민(飢民)을 진휼할 때 적게는 몇 섬에서 많게는 1,000여 섬 정도의 곡식을 의연(義捐)할 수 있을 만큼 저장하고 있는 자를 요호라고 하였는데, 200섬 이상의 의연곡(義捐穀)을 낼 수 있는 자는 한 도에 몇 명씩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료에서는 19세기 중엽 연해의 요충지로서 이름난 도회지였던 마산 포구에는 많은 부민(富民)들이 거주했는데, 중도에 구제하는 정치가 없어 요민(饒民)으로 어지러이 흩어진 자가 천 호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 사료 모두 지역 사회에 요호가 다수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요호 침탈 문제는 18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19세기에는 사회 갈등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이를 당시에는 한마디로 ‘요호 늑탈의 폐’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요호들은 문란한 환곡제에 의한 남징(濫徵) 외에도 도결(都結)로 인해 과다한 부담을 져야 했고 수령이나 향리 토호들로부터 뇌물과 예전(禮錢), 때로는 별도의 잡세 혹은 무고하게 죄안(罪案)에 연루된 후 용서받는다는 명목으로 수탈당하고 피해를 받아 왔다. 그런 만큼 요호들은 불만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당시 사회 모순에 대해 선도적인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18세기 말까지 요호들은 하층민을 딛고 상층 지배 계급 속으로 편입되는 데 주력하였다. 요호층이 신분 상승을 위해 활용한 방법은 다양했다. 우선 전통적인 방법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호구단자를 위조하여 나이를 바꿔 고령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활용해 생원 진사에 합격하거나 벼슬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조차도 버거운 요호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매관매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에 편입되고자 하는 요호들의 노력이 성과를 내기 쉽지 않았고, 또한 그런 노력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책도 아니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요호들은 향회(鄕會)를 주도하면서 민의를 수렴하여 집약하고 상호 연대 의식을 형성시켜 갔다. 이들은 향회를 평상시에는 자치를 위한 기구로 이용했고, 농민 항쟁기에는 권력에 맞서기 위한 매개체로 활용했다. 요호층은 철종 때 농민 항쟁을 통해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농민 항쟁이 전개되었을 때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된 박규수(朴珪壽)는 요호 부민들이 도결과 통환(統還)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항쟁을 유발한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항쟁을 주도한 자들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도결로 인해 많은 세를 징수당했고, 통환도 면제받지 못해 큰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철종 대 민란 이후 30여 년 만에 전개된 ‘1894년 농민전쟁[東學亂]’의 배경에도 요호층의 문제가 일정 부분 배경이 되었다. 요호층은 기존 체제 하에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가혹한 침탈이 가중됨으로써 존립마저 위태로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농민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주도층의 일원이 되었다. 다만, 1894년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결집하지는 못하였다. 만일 1894년 당시 개화파가 요호층이 포함된 농민군의 역사적 위상을 올바로 인식해 서로 연대했다면, 요호들은 근대 민족사를 이끌어 갈 새로운 주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는 당시 요호층을 비롯한 민중에 대해 자신들의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요호층을 근간으로 하는 농민군이 개화파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상호 보완적 세력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적대적인 관계에서 서로 대립하였고, 그로 인해 근대를 향한 변혁 과정은 외세와 그 추종 세력에 의해 좌절 · 왜곡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