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은 조선후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나 1673년(현종 14)에 사망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32세 이후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다가 사망했다. 이때 체험한 농촌생활을 토대로 경세제민의 정책론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100년 뒤 영조의 칭찬을 받고 간행되었다. 그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의 이상론이 되었고,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으로 자리잡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외 다방면의 저작이 있었다고 하나 목록만 전해진다.
임진왜란 뒤 사회가 극도로 어지럽고 양반 사회의 모순이 노정되어 가던 17세기 초에 한성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나, 불행히도 2세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 유흠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좌되어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5세 때부터 취학해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을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를 역임했고, 대사헌까지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외교관이기도 하다.
15세가 되던 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했고, 다음 해에는 지금의 양평땅인 지평 화곡리(砥平花谷里)로 이사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1644년 23세 때에는 할머니의 상, 1648년 27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으며, 탈상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그 뒤 1651년(효종 2) 30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2년 뒤 복상(服喪)을 마치자, 그 해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멀리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기 시작해 20년 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남 6녀를 남기고 1673년에 죽었다. 반계라는 호도 이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서 쓴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주저(主著)로서, 그 동안 겪은 농촌 생활에서의 체험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으로서 정책론(政策論)이라 하겠다. 이 책의 성립 연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연보 등을 통해 추정하면, 우반동으로 와서 은거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후에서 11년 사이로, 유형원의 나이 38세부터 43세 사이가 될 것 같다.
『반계수록』의 주된 내용은 ① 전제(田制: 토지 제도), ② 전제후록(田制後錄: 재정 · 상공업 관계), ③ 교선지제(敎選之制: 향약 · 교육 · 고시 관계), ④ 임관지제(任官之制: 관료 제도의 운용 관계), ⑤ 직관지제(職官之制: 정부 기구의 관계), ⑥ 녹제(祿制: 관리들의 보수 관계), ⑦ 병제(兵制: 군사 제도의 운용 관계), ⑧ 병제후록(兵制後錄: 축성 · 병기 · 교통 · 통신 관계), ⑨ 속편의 의례 · 언어 · 기타, ⑩ 보유편(補遺篇)의 군현제(郡縣制: 지방 제도의 관계) 등으로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반계수록』 이외에도 정치 · 경제 · 역사 · 지리 · 군사 · 언어 · 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전하나, 불행하게도 『반계수록』 이외에는 서목(書目)만이 전해진다. 주요한 것으로 ① 성리학 관계의 『주자찬요(朱子纂要)』 · 『이기총론(理氣總論)』, ② 지리서로는 나이 35세 때인 1656년에 박자진(朴自振)과 함께 『동국지지(東國地志)』에 대해 깊이 토론한 끝에 지리의 식견을 정리한 『여지지(輿地志)』를 비롯해 『지리군서(地理群書)』 등이 있으며, ③ 역사서로는 44세 때 편찬한 『동국사강목조례(東國史綱目條例)』를 비롯한 『동사괴설변(東史怪說辨)』 · 『동국가고(東國可考)』 등이 있다. 그리고 ④ 병법서로 『무경사서초(武經四書抄)』 · 『기효신서절요(紀効新書節要)』, ⑤ 음운(音韻) 관계의 『정음지남(正音指南)』, ⑥ 문학 관계의 『도정절집(陶靖節集)』 · 『동국문초(東國文抄)』, ⑦ 기타의 저술로 『기행일록(紀行日錄)』 등을 꼽을 수 있다.
죽은 뒤 유형원의 명성이 얼마 동안은 세상에 묻혀 있다가, 100년 뒤에 와서야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왕(영조)도 관심을 가져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왕명을 받아 『반계수록』의 서문과 함께 세상에 알린 사람이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이미(李瀰)였고, 반포한 때가 1770년(영조 46)으로 유형원이 죽은 지 꼭 97년 뒤의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이전 1753년에는 조정에서 유형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을 추증했고, 1768년 10월에는 판중추 홍계희(洪啓禧)가 찬한 묘비가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1770년에는 다시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 · 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유형원은 경자유전(耕者有田)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형원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유형원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 · 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