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시옹(時翁). 김창(金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원신(金元信)이고 아버지는 제주목사 김율(金硉)이며 어머니는 성극양(成克讓)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기사관이 되었다. 1525년에 대교로부터 벼슬길에 들어서 1529년 정언이 되어 국정 전반에 관한 내용을 임금에게 직간하였다.
특히 15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선왕인 성종 때에는 문신과 무신들이 모두 재예(才藝)를 갖추어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자신들의 재능을 모두 정치에 반영할 수 있었으나 오늘의 실정이 그렇지 못한 것은 임금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직언한 바 있다. 1531년 헌납이 되었고 이어 지평·검상·전한·집의·정주별선위사(定州別宣慰使)·우승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 초에는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53년(명종 8)에는 호군으로도 활약하였다. 말년에는 김안로(金安老)·이임(李任)·허항(許沆) 등과 함께 괘방서사건(掛榜書事件)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한어(漢語)에 밝았고 사리판단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