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청(載淸), 호는 북일(北逸). 할아버지는 김신(金信)이고, 아버지는 김양준(金良俊)이며, 어머니는 변심(卞鐔)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44년 주서(注書)가 되었다.
1545년(인종 1) 봉교(奉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면서『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검열이 되자, 대간 이화종(李和宗) 등이 사관(史官)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 지평(持平)이 되어 당시 민생고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실시되고 있던 금주령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더욱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57년 암행어사의 직무를 띠고 함경도에 파견되기도 하였고, 1563년 정론(正論)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이듬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1566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