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중호(仲浩). 한성판윤 이광하(李光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집(李㙫)이고, 아버지는 이주진(李周鎭)이다. 어머니는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며, 부인은 서명빈(徐命彬)의 딸이다.
일찍이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랑(正郞)으로 재직하던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간쟁에 충실하다 한때 영조의 미움을 샀고, 그 뒤 수찬으로 옮겼으나 1759년 일시 파직되기도 했다.
이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1760년을 전후로, 세자시강원의 겸찬독(兼贊讀)을 맡아 세손의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아울러 홍문관교리로 있으면서 산림(山林)·처사(處士)들을 초치(招致)하여 등용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부수찬을 거쳐 응교로서 재직하던 1762년에는 응제(應製)에 수석하여 말 안장(鞍裝)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판부사 조재호(趙載浩)가 불령(不逞)한 말을 전했다는 난언(亂言) 죄인 엄홍복(嚴弘福)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삭직(削職)되었고, 이후 1764년에는 수원부사 재직 중 옥중 죄인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1765년 승지에 제수된 후 잠시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복귀하였다. 그 뒤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거쳤으며, 승지로 재직하던 1767년에 수원부사 재직 당시 마병(馬兵)을 허술하게 했다는 이유로 전부사 홍지해(洪趾海)·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파직된 뒤, 진잠현(鎭岑縣)에 충군(充軍)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봉조하 홍계희(洪啓禧)를 도와 『의주(儀註)』를 편찬한 공으로 곧 석방되어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1770년(영조 46)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어 영조 말년에는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쳤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찬집청(纂輯廳) 당상(堂上)을 겸하면서 이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