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좌부승지, 홍문관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번(仲蕃)
봉탄(鳳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5년(명종 10)
사망 연도
1598년(선조 31)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좌부승지|홍문관부제학|호조참의|대사간
정의
조선 중기에, 좌부승지, 홍문관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번(仲蕃), 호는 봉탄(鳳灘). 윤이손(尹李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윤개(尹漑)이다. 아버지는 생원 윤비(尹棐)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좌윤 이성언(李誠彦)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 22) 홍문록에 뽑혔으며, 그 뒤 장령·부응교 등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승지 유영순(柳永詢)과 처남·매부간이 되어 상피(相避)가 되므로 관직이 갈렸다.

이어 병조참지에 제수되었다가 곧 우부승지·동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했고, 1595년(선조 29) 홍문관부제학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고,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사간 재직 시 승문원제조를 겸하여 전란 중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또 명(明) 장수 양호(楊鎬)에게 보낼 사형 집행인인 회자(劊子)를 전담했는데, 양호에게 보낼 회자를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으나 명에 보낼 공문인 자문(咨文)의 비밀누설 책임으로 담당 승지를 추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뒤 호조참의·대사간이 되었다가 도승지로 특채되었다. 정유재란 시 선조를 호종했다. 사후 선조는 2품의 경우보다 약간 감해서 물품을 보내 치부(致賻)하였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경솔하지 않았고, 식견이 있어 중후하고 엄격했으며, 청론(淸論)을 취하여 경박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집필자
박홍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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