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번(仲蕃), 호는 봉탄(鳳灘). 윤이손(尹李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윤개(尹漑)이다. 아버지는 생원 윤비(尹棐)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좌윤 이성언(李誠彦)의 딸이다.
1579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 22) 홍문록에 뽑혔으며, 그 뒤 장령·부응교 등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승지 유영순(柳永詢)과 처남·매부간이 되어 상피(相避)가 되므로 관직이 갈렸다.
이어 병조참지에 제수되었다가 곧 우부승지·동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했고, 1595년(선조 29) 홍문관부제학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고,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사간 재직 시 승문원제조를 겸하여 전란 중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또 명(明) 장수 양호(楊鎬)에게 보낼 사형 집행인인 회자(劊子)를 전담했는데, 양호에게 보낼 회자를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으나 명에 보낼 공문인 자문(咨文)의 비밀누설 책임으로 담당 승지를 추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뒤 호조참의·대사간이 되었다가 도승지로 특채되었다. 정유재란 시 선조를 호종했다. 사후 선조는 2품의 경우보다 약간 감해서 물품을 보내 치부(致賻)하였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경솔하지 않았고, 식견이 있어 중후하고 엄격했으며, 청론(淸論)을 취하여 경박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