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초(軔草). 유수천(柳壽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잠(柳潛)이다.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해 1605년(선조 38) 세자익위사사어로 세자를 보필하고, 이듬 해 재령군수로 부임하였다. 군수로 재직 중이던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처남인데다 당시 조카 유효립(柳孝立: 柳希鏗의 아들)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논란이 일었다.
1610년(광해군 2) 안산군수로 옮겼다가 정언·문학·지평 등을 역임한 뒤, 이듬 해 홍문관부교리·사헌부헌납·예조정랑·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정랑 의망(擬望: 3인의 후보자를 왕에게 추천함)시 4품의 위치였기에 낭천(郎薦: 전랑의 추천)이 막혔으나 외척세력에 영합한 정랑 이후(李厚)의 적극 천거로 제수되었고, 유씨 자제들이 차례로 전랑에 의망되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612년(광해 4) 직강 때 권필(權韠)의 시 내용을 문제삼은 무고로 유배케 하였다. 1615년(광해 7)에는 광해군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기 위해 설치한 존숭도감(尊崇都監)의 낭청으로 일하였다.
그 뒤 전한·응교·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조참의 때 이이첨(李爾瞻) 등이 적극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였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 때 이이첨 등과 함께 허균(許筠)의 심복들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정적 허균(許筠)을 능지처참케하였다. 그 뒤 사포서제조, 겸동지경연을 역임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형 유희분(柳希奮)과 함께 주살(誅殺)되었으며, 자손들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유희발과 형 유희분 모두 광해군 폐비 유씨의 형제로서,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진릉군(晉陵君)·능창군(綾昌君)의 화가 모두 이들의 모의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