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노천(老泉), 호는 후촌(後村). 유여(柳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광훈(柳光勳)이다. 아버지는 유경원(柳敬元)이며, 어머니는 권흠(權䃢)의 딸이다.
문음으로 입사해 4품직인 첨정(僉正)직을 수행하다가, 1598년(선조 3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후 형조정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지냈다. 홍문관 재직시 경연에서는 주로 『주역』을 강하였다. 이후 의정부사인, 세자시강원필선, 홍문관의 교리·부응교를 거쳐 경상도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홍문관응교로 승진했다가 1605년(선조 38)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양계(兩界) 관기를 데려다 거느렸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 우승지로 옮겼고, 대사간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수어의(首御醫) 허준(許浚)의 잘못된 약의 처방기를 문제삼은 탄핵 문제로 혐의를 받고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호조·예조·형조 참의, 부제학을 거쳐 다시 대사간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조참의·병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선조 때 죽은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는 면복(冕腹: 곧 왕비로의 정식 승인)을 청하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갔다 온 공으로, 외거노비 3구와 토지 20결이 하사되었다.
그 뒤 우참찬으로 승진해 우의정 한효순(韓孝純) 등이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廢妃論)에 가담하였다. 인목대비를 폐출하자는 의견이 있을 당시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헌으로 그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619(광해군 11) 인목대비를 강등하여 서인(庶人)으로 하는 폄손절목(貶損節目)을 감정할 때 우연히 눈물을 흘렸다가, 그 일로 탄핵되어 울산부사로 밀려났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요양이 함락되어 명나라로 들어가는 육로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어 수로를 개척·이용하였다.
중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환 도중 배의 침몰로 진위사(陳慰使) 박이서(朴彛敍), 서장관(書狀官) 정응두(鄭應斗) 등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 유여항(柳汝恒)과 유여각(柳汝恪)이 이 일로 가자(加資: 정3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려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