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이(守而). 호는 명주(明州). 유광훈(柳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경원(柳敬元)이다. 아버지는 참찬 유간(柳澗)이며, 어머니는 이기(李墍)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을과로, 동생 유여항(柳汝恒)은 병과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록에 뽑혀 홍문관의 정자·박사, 시강원 겸 설서를 거쳐 1615년(광해군 7)에는 광해군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추숭(追崇)을 위해 설치한 존숭도감낭청(尊崇都監郎廳)으로 일하였다. 이후 정언·부수찬을 거쳐 사은사 김권(金權)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홍문관부수찬에 있을 때, 수찬 유여항과 같이 패초(牌招: 임금이 명령패를 내려 부름.)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제가 나란히 추고당하였으나, 곧 수찬에 이어 헌납직을 제수 받았다.
이 때 문과중시(重試)에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이대엽(李大燁) 등과 함께 급제되었으나 당시 선발된 7인 모두가 이이첨의 문객이었고,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인조반정 후 소급하여 급제를 취소하였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지평·부수찬·헌납·부교리·부수찬 등을 역임하던 중, 진위사(陳慰使)로 중국에 갔던 아버지 유간(柳澗)이 해로로 귀국 도중 배의 침몰로 죽게되자 품계를 올려주었다.
동래부사 재직시 관아의 기생을 데리고 살고자 재물을 바치고 속량(贖良)을 꾀하다 추고당하였으며, 가뭄을 당하여 임금이 근신 중임에도 음주와 지나친 세금부과로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