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홍(士弘). 참판 윤집(尹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윤심(尹深)이다. 아버지는 윤휘성(尹彙成)이며, 어머니는 정도현(鄭度玄)의 딸이다. 양부는 윤휘양(尹彙敭)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729년(영조 5) 정언으로 재직 시 인재등용을 고르게 하고 탕평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영조의 미움을 받아 영의정 이집(李㙫)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삭출당하였다. 그 뒤 1733년(영조 9) 정언으로 재임용되었고, 사서·부수찬·수찬·부교리·정언 등을 역임하다가 지방관으로 자청하여 용강현령(龍崗縣令)이 되었다. 그러나 관직(館職)에 있으면서 지방고을로 나간 것은 기름진 고을을 점유하려는 욕심때문이라는 집의 정희보(鄭熙普)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742년(영조 18)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조경(趙璥)의 처치를 옥당(玉堂: 홍문관)과 대간이 서로 미룬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으로 복귀하였다. 이 때 혜성이 나타나자 측후관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 뒤 장령·교리·부응교·사간·집의·사인·응교 등을 거쳐 승지로 발탁되었다. 대사간·대사성을 역임한 뒤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승지·이조참의·형조참판·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승지 재직 시 당습의 폐단을 상서하여 왕세자의 신임을 받았다. 궁인문씨(宮人文氏)를 소원(昭媛)으로 제수하려는 교지에 어보를 끝까지 거절하였으나 영조는 윤광의의 정직함을 가상히 여겼다. 정조 때 판중추부사 윤숙(尹塾)에 의해 청백리에 추천, 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