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선원(善元). 유홍(柳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희택(柳希澤)이다. 아버지는 유전(柳詮)이며, 어머니는 민기무(閔起武)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5년(선조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예문관의 대교·봉교 등을 거쳐 1598년(선조 31)에 함경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앙관직으로 복귀하여 사간원의 정언·헌납을 지내다가, 독향사(督餉使)의 종사관(從事官)의 임무를 띠고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첨정 조존성(趙存性)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사서·예조좌랑·병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의 청요직(淸要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중요한 관직)을 거쳐, 1606년(선조 39)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 임무를 무리 없이 마치고 귀국했다. 이듬해 강원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벌목 노역의 폐단을 없애는 데 노력했다.
그 뒤 병조정랑에 재임명되었고, 장령·사예를 거쳐 광해군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기용된 뒤 사간·장령·필선의 직을 수행하였다. 간관(諫官)으로 재직시 선조의 어의(御醫: 임금의 진료와 치료를 맡았던 의료관직)였던 허준(許浚)의 약 처방 문제의 시비를 논하려다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고, 사헌부집의로 재등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승지 재직 시 지방관의 포상 남발에 대한 규제에 노력했고, 균전사(均田使)로 지방에 파견되어 양전(量田: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황해도감사를 거쳐 대사간·대사헌직을 맡았다. 이때 인목대비 폐비론에 가담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계해역흉(癸亥逆兇: 인조반정에 반기를 들어 주동한 인물)으로 지목되어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