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명(汝明). 윤시영(尹時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청(尹淸)이다. 아버지는 윤민신(尹民新)이며, 어머니는 이경종(李敬宗)의 딸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세자가 전주에 머물면서 실시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윤구(尹昫) 등 5형제가 모두 등과자이다. 1595년(선조 28) 함경도도사로 근무 중 폭정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남쪽 변방지역의 접반관(接伴官)으로 활동하였다. 1599년 정언에 제수된 뒤 동지사 정엽(鄭曄)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나 정엽의 비행을 눈감아 준 견문사건(見聞事件)으로 파직, 추고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으로 복귀한 뒤 정언에 재등용되어 윤두수(尹斗壽)·정영국(鄭榮國)을 탄핵하였고, 이어 경성판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사리사욕만 취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02년(선조 35) 사간원헌납을 제수 받은 뒤 성균관전적·형조정랑을 거쳐 1605년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다가 2년 뒤에는 전적·형조정랑으로 재임용되었다.
1608년(선조 41)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필선·집의 등을 거쳐 1614년(광해군 6) 우부승지에 올랐다.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유희분(柳希奮) 등의 소북세력과 교류하여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사사된 뒤에도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