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동부승지, 병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칭
사소(士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76년(선조 9)
본관
문화(文化, 지금의 황해도 신천)
주요 관직
전주부윤|형조참의|동부승지|병조참판|형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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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동부승지, 병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사소(士昭). 유승조(柳承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제근(柳悌根)이다. 아버지는 유수천(柳壽千)이며, 어머니는 부평부사 김성동(金誠童)의 딸이다. 유자신(柳自新)의 아버지이고, 광해군의 비(妃)인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의 할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0년(중종 35)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 지평으로 진출하였고, 이듬해 부수찬 · 수찬 · 교리를 역임하였다. 1548년(명종 3) 병조정랑을 역임하던 중 평안도어사로 파견되어 구황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진휼에 힘썼다.

그 뒤 부수찬에 제수되어 평지의 진전(陳田: 토지대장에는 등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경작하지 않는 토지)에 대한 면세를 건의하는 등 구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뒤 장령 · 수찬 · 교리, 사헌부집의, 홍문관부응교, 의정부사인, 상의원정을 거쳐 수선(修繕: 건물이나 도로 및 성지의 수리)을 감독한 공로로 당상관에 올랐다.

1555년(명종 10) 외직인 전주부윤으로 나갔다가 형조참의 · 동부승지를 거쳐, 1562년(명종 17) 성절사로 명나라에 사은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판 · 청홍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으나 곧 태릉 수릉관(守陵官)의 임무를 맡아 아들 유자신(柳自新)을 참봉으로 삼아 부자가 함께 일하였고, 이의 공으로 1자급 가계(加階: 품계가 오름)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1572년(선조 5) 형조판서로 옮겼으며, 이듬해 권철(權轍) · 유희춘(柳希春) 등과 함께 정시(庭試)의 시관(試官)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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