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이우인(李友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상의(李尙毅)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지완(李志完)이며, 어머니는 이결(李潔)의 딸이다.
1612년 진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執義) 등을 거쳐 1647년 우승지에 올랐다.
1644년 교리로 있을 때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경흥·경원·온성 등지에 침입하여 횡포를 자행하던 여진인에 대하여 조정의 명으로 그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또, 1648년에는 왕명으로 별시문과에서 초시를 파하려 하자, 그 부당성을 강력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 때 동래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남만인(南蠻人) 30여 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1660년(현종 1)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54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탐라지(耽羅志)』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