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13책. 목판본. 반계는 저자의 호이며, 수록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이나 이는 저자의 겸사이고 체계가 정연한 저술이다.
이 책은 저자가 관직의 생활을 단념하고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칩거해 52세까지 22년간에 걸쳐 연구한 것이다. 실록 등의 기록에 『반계수록』을 13권이라고 한 것은 그의 개혁안만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적 고찰을 한 고설(攷說)을 제외한 것이다.
경상도관찰사로서 출판의 일을 맡았던 이미(李瀰)가 1770년(영조 46)에 쓴 서문과 후학 오광운(吳光運)이 1737년에 쓴 서문이 붙여 있다. 책의 말미에는 저자 자신이 쓴 ‘서수록후(書隨錄後)’가 실려 있다.
본편은 자신의 개혁안과 그에 대한 중국과 우리 나라 고려 · 조선의 법제에 대한 내용을 다룬 고설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본편의 편차는 권1 · 2는 전제(田制), 권3 · 4는 전제후록(田制後錄), 권5 · 6은 전제고설(田制攷說), 권7 · 8은 전제후록고설, 권9 · 10은 교선지제(敎選之制), 권11 · 12는 교선고설(敎選攷說), 권13은 임관지제(任官之制), 권14는 임관고설로 구성되었다.
이어 권15 · 16은 직관지제(職官之制), 권17 · 18은 직관고설(職官攷說), 권19는 녹제(祿制), 권20은 녹제고설, 권21은 병제(兵制), 권22는 병제후록, 권23은 병제고설, 권24는 병제후록고설, 권25 · 26은 속편(續篇) 보유편의 군현제로 되어 있다.
저자 자신이 쓴 ‘서수록후’에 의거해 살펴본 저술 동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현실이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다고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을 읽으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기록, 정리하고 현실에 적용시킬 가능성을 심사숙고해 체계적으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같은 경우를 지적한 예를 찾아보면 대토지를 소유한 자와 송곳을 꽂을 만한 조금의 토지도 소유하지 못한 자가 있을 정도로 토지가 일부의 사람에 의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농민은 유망(流亡)하게 되고 그 피해는 이웃의 농민에게 넘겨진다고 보았다. 여기에 각종 무거운 세금의 부과와 세정의 문란은 농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왔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둘째, 진한(秦漢) 이후의 법제가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제정됨으로써 그 모순이 고쳐지지 않아 폐단이 쌓이고 쌓였다. 그래서 마침내는 중국이 오랑캐에 멸망되었고, 우리 나라는 외침을 받아 천하의 수치를 당하였다는 점이다.
폐단이 있는 법을 고치지 않고는 세상이 잘 다스려질 수 없으며, 폐단이 폐단을 낳아 오랜 시간을 지내는 동안 실처럼 얽히고 설켜 그 근본을 찾지 않으면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유형원은 진한 이래의 후세의 법제는 사욕(私慾)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를 천리(天理)에 바탕을 둔 법제로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일례로, 정전법(井田法)은 국민이 토지를 균등히 경작한다는 정신을 저자 당시에도 살려야 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천리에 바탕을 둔 법제는 합리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욕에 바탕을 둔 법제로 노비세습제(奴婢世襲制)를 예로 들면서, 이는 천하의 악법 중에 악법이라고 논하였다.
셋째, 당시 학자와 관료들의 학문 태도와 세태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의 생각에 공직에 있는 자는 이미 과거 시험을 거쳐 진출했으나 세속을 그대로 따름이 편하다는 것을 알뿐이었다.
또한 재야의 학자는 더러 자신의 수양 공부에는 뜻이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이러니 이 세상이 다스려질 날이 없어 생민의 피해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적은 문장의 시험을 거쳐 관리가 된 자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공부가 결여되어 있고 재야의 학자는 성리철학만을 연구해 자신의 수양에 전념할 뿐 통치의 학문을 소홀히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리학적 공부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함을 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면적 도덕적 수양만을 강조하던 성리학에서 외적 행동을 규제하는 법제의 개혁을 통해 천리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학자들의 사회적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유형원의 모든 개혁안은 토지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과 교육 및 임용의 개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지 제도는 국가에서 경작권을 분배하고 환수할 수 있는 공전제(公田制)로 하여 모든 국민에게 지급해 기본 생활을 보장한다.
토지측량법은 문서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고 동시에 세금을 걷기 위한 제도인 결부법(結負法)을 실지 면적을 단위로 하는 경무법(頃畝法)으로 개혁해 정확한 측량을 실시한다.
지급한 토지를 대상으로 모든 조세(租稅)와 군역(軍役)을 부과하되 다른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그리고 조세를 수확량의 20분의 1을 경상적인 세금으로 부과해 이 수입으로써 국가의 지출을 한정한다.
군역은 농민 4명이 받은 4경(頃)에서 한 사람을 내게 하여 군역을 2개월씩 지게 한다. 이러면 군역이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기 때문에 유동성이 없다는 것이다.
상공업은 발전시키되 세금 부과를 통해 농업이 위축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한다. 화폐는 당시 사용되던 포(布)를 폐지하고 주조화폐(鑄造貨幣)를 통용하며, 이의 유통을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전국민의 도덕 교육을 위해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한다. 교육 제도는 1차 학교로 부(府) · 도호부(都護府) · 목(牧) · 군 · 현에는 읍학(邑學)을, 서울에는 사학(四學)을, 2차 학교는 도 단위에 영학(營學), 서울에 중학(中學)을, 최고 학교로 서울에 태학(太學)을 설치한다.
읍학에서 학업과 인격이 뛰어난 자를 영학에 추천하고, 영학에서 태학에 추천하며, 태학에서 정부에 추천해 관리로 임용한다.
읍학의 학생은 사대부(士大夫)의 자제와 일반 백성의 자제 중 능력이 있는 자를 선발하고, 그 정원과 상급 학교에 추천할 수 있는 수는 그 행정구역의 토지 면적과 인구수에 비례하도록 정한다.
모든 학생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숙식 비용과 모든 경비를 국가 재정으로 지출한다. 이처럼 교육 기관에서 추천해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를 공거제(貢擧制)라 한다. 이밖에 전문 교육을 위해 기술학교를 둔다.
관료의 임용은 임기제를 철저히 지키게 하여 행정의 실효를 거두도록 한다. 임기를 중앙직은 6년, 외직은 9년으로 연장하며, 40세가 넘어야 관료로 임용하고, 관료의 업적을 평가해 이에 따라 승진시킨다.
교육기관을 통한 임용 이외에 능력 있고 학문이 뛰어난 자를 3품 이상의 관료에게 9년에 한 번씩 추천하게 하여 천거된 자를 한 곳에 모아 1년간 재능을 살핀 뒤에 임용하되 잘못 추천되었을 경우에는 추천한 자를 파면한다.
행정의 직제는 임시관청을 설치하지 말고, 기능을 통합해 단일화한다. 재상들이 겸직하는 육조의 예하 기관을 육조에 예속시켜 의정부 · 육조를 기간으로 하는 체제로 정비한다. 왕실을 위해 설치된 많은 관서를 대폭 축소한다.
또한 왕실 재정을 별도로 하지 말고 국가 재정으로 일원화하고 임무가 없는 관직을 폐지해 재정 지출을 줄이는 원칙아래 구체적인 안이 제시되었다. 지방 제도는 관찰사 아래에 관직을 보강해 실제 행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군현 아래에 면(面)과 이(里) 단위를 체계적으로 조직해 향촌 질서를 재편성한다.
녹제(祿制)에서는 관료의 봉급을 당시의 것보다 증액시켜 탈법적인 부정이 없도록 한다. 봉급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 서리직(書吏職)에도 일정한 액수를 지불한다는 원칙 아래 구체적인 안이 제시되었다.
군제(軍制)는 중앙에 육위군(六衛軍)과 지방군을 두되 토지를 대상으로 군역을 부과하고 군역을 지는 자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保)를 지급한다. 그리고 방어 시설인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개조해 설치하며 군사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해 항상 방어 태세를 갖춘다는 구체안을 제시하고 있다.
속편에서는 기타의 문제가 다루어졌다. 이 중 노비세습제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공전제가 실시될 때까지는 종모법(從母法)만을 실시해 노비 수를 줄이자고 하였다. 그 뒤에는 이들을 품삯을 주고 고용하는 용역제로 전환시킨다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군현제에 대해서는 군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개인 인물의 출신지라 하여 군현이 승강(昇降)되는 폐단과 행정구역이 들쭉날쭉한 것을 바로잡고 군현의 크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원칙아래 개편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반계수록』에 담긴 내용은 현실 법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안정된 국민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지역적인 불균등과 신분적인 특권을 해소해 모든 사람이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의 실현에 목표를 둔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주체를 왕의 결단에 둠으로써 당시 권력구조상 실현될 수 없는 것이고 왕조가 새로이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理想案)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개혁안을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즉 관료에게는 토지의 지급에서도 차등을 두었고, 공직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조처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학자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는 경향은 후세학자에게 영향을 주어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개혁안은 당시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당시까지의 동양인이 생각했던 합리적인 제도를 폭넓게 수렴해 이상적이면서도 행정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체계적인 것이었다.
당시 관료들이 조종(祖宗)의 법이라 하여 고쳐서는 안 된다는 수구사상(守舊思想)에 대해 체계적인 개혁을 제시한 점에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이전에 개혁을 주장한 자들의 부분적인 개혁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1678년(숙종 4) 저자의 친구였던 참봉 배상유(裵尙踰), 1694년 유생 노사효(盧思孝) 등이 개혁안의 실시를 촉구하라고 상소하였다. 1741년에는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영조에게 이 책을 추천하였고, 좌참찬 권적(權𥛚)이 세자에게 이 책의 간행을 청하였다.
또한 홍계희(洪啓禧)의 청으로 예문관에서 3부를 찍어 사고(史庫)에 보관하고, 신하에게도 반포가 허락되었으며 경상감영에서 출판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동국문헌비고』에는 이 책의 서명이 법전으로 실렸다.
한편 후학으로는 이익(李瀷) · 안정복(安鼎福) · 정약용(丁若鏞) 등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개화기에는 근대적인 한국 사회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1770년 경상감영에서 26권 13책이 목판으로 인쇄되었고, 군현제가수록보유편으로 1783년에 경상감영에서 다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고서본은 40여 질이 현전하고 있다. 1954년에 동국문화사에서 영인 되었고 이 영인본에 부록 자료를 추가해 1974년에 경인문화사에서 다시 영인되었다. 한장경의 번역본이 충남대학교에서 4책으로 출판되었고(1962∼1967) 북한사회과학원에서도 완역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