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때 재정개혁책(財政改革策)의 일환으로 설치되었으며, 관원으로는 종5품의 사를 비롯하여 부사(종6품)·승(丞, 종7품)·주부(종8품) 등이 두어졌다.
과렴(科斂)과 비슷한 성격의 연호미법(烟戶米法)에 의하여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밖에도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재정적 기반을 삼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 사고(私庫)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점차 왕실의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 본래 목적인 구휼보다는 왕실의 토지 탈점을 위한 기구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충혜왕의 사고인 보흥고(寶興庫)에 병합되면서 폐지되었다. 그 뒤 다시 설치되어 공민왕 초까지 존속하였으나, 이후의 연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