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 ()

조선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
이칭
이칭
객관(客館)
제도/법령·제도
폐지 시기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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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객사는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다. 고려 초기부터 있던 것으로 확인되며, 중앙의 정당에는 국왕의 상징인 전패 또는 황제의 상징인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좌우의 익실은 외방 사신이나 여행하는 관료, 또는 외국에서 오는 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하였다.

정의
고려 ·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
내용

객사(客舍)는 고려 ·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한 관사(館舍)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을 두었다. 정당에는 기와와 돌을 깔았고 좌우의 익실에는 온돌을 두었다. 각 고을 객사의 정당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해 놓았고 좌우의 익실은 숙소로 사용하였다.

객사는 각기 고유의 명칭이 있었다. 평안도의 중화(中和) 객사는 '생양관(生陽館)', 순안(順安) 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숙천(肅川) 객사는 '숙녕관(肅寧館)', 안주(安州) 객사는 '안흥관(安興館)', 가산(嘉山) 객사는 '가평관(嘉平館)'이라 불리었다. 현존하는 객사 건물은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객사로는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국보), 전주 객사(보물), 안변 객사의 가학루(駕鶴樓, 1493), 고령 객사의 가야관(伽倻館, 1493), 경주 객사의 동경관(東京館) 서헌(16세기 말) 등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객사로는 성천객사(成川客舍) 동명관(東明館)의 강선루(降仙樓), 통영 객사, 여수 객사 등이 남아 있다.

객사는 아전(衙前)들이 맡아 관리하였다. 고려 때, 지방의 잡직(雜職) 가운데 '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객사를 담당하였다. 고을의 규모에 따라 담당 아전의 수가 달랐다. 1천 정(丁) 이상의 군현에는 4인, 5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3인, 3백 정 이하의 군현에는 2인, 1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1인씩 두었으며, 동서의 방어사(防禦使) · 진장(鎭將) · 현령관(縣令官)에는 각각 2인씩 두었다.

지방 수령은 1월 1일 정조(正朝), 동지, 왕의 탄신일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또한 수령이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반드시 전패에 문안례를 올렸고, 임지에 새로 부임할 때도 전패에 배례하는 것이 순서였다.

변천사항

고려시대에는 국내에 방문한 외국 사신들을 객사에 머물도록 하였고, 이곳에서 연회도 열었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전패를 안치해 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望拜)하였다. 그리고 사신(使臣) 또는 공무를 수행하는 관료들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하였다. 특히 명나라와 통하는 연변에 위치한 객사에는 우리 사신뿐만 아니라 명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는데, 건물 보수 등을 이유로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있어서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각 고을의 객사에 봉안한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겼는데, 대한제국기에 국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1896년(건양 1)에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패인 궐패(闕牌)로 모두 바뀌었다.

의의 및 평가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모든 고을에 객사를 설치하였다. 객사의 정당에 국왕의 상징인 전패 또는 대한제국기 황제의 상징인 궐패를 봉안하여 통일된 의례를 행하고, 익실은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함으로써 조선 왕조에서 추구한 중앙 집권화 정책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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