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종 조세와 국역을 부담하던 양인(良人) 남자의 통칭이자 고려시대의 경우 일정 면적의 토지이다. 정은 인정과 토지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정은 16세에서 59세에 이르는 양인 남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또한 일정 면적의 토지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고려 시기에는 군현의 크기를 1,000정 이상의 주현, 500정 이상의 주현이라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정의 의미를 둘러싸고 인정과 토지 외에 호(戶)의 의미였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에서 조세(租稅) 부과 및 부역(賦役) 징발을 위해 정(丁)을 편제하였다. 일명 정남(丁男)이라고도 했으며, 정인(丁人) · 정구(丁口) · 정부(丁夫) · 인정(人丁)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는 15세 이상 59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16∼59세까지의 남자를 정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16∼20세까지의 남자를 중남(中男)으로 했다가 21세가 되면 정남으로 편성했던 당(唐)나라와 차이를 보인다. 성인 남자는 60세가 되어야 정에서 벗어나 ‘노(老)’가 되어 각종의 부담을 면제받았다. 국가는 바로 이와 같은 정을 각종 조세의 부과와 부역 징발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정남은 1인당 5석(石)의 곡물과 5필의 포(布)를 인두세(人頭稅)로 냈으며, 그가 구성하고 있던 호(戶)의 빈부에 따라 호당 5두(斗)에서 1석에 이르는 호조(戶租)를 냈다. 또한 대략 3년을 기한으로 군역(軍役)과 연간 1∼2개월 정도의 부역을 부담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인 722년(성덕왕 21)에는 정(丁)을 대상으로 정전(丁田)이 지급되었다. 정남은 이를 경작해 국가에 납세할 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군역과 각종의 부역도 부담하였는데, 소유 재산과 인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편성된 구등호제(九等戶制)가 그 부과의 기준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정은 크게 정호(丁戶)와 백정(白丁)으로 구분된다. 정호는 국가에 특정한 역(役)을 담당하던 사람으로서 그 대가로 소정의 수조지(收租地)를 받았다. 군역을 졌던 군인호(軍人戶)가 대표적인 존재인데, 이들은 전정연립(田丁連立)의 원칙에 의해 그 역(役)과 반대 급부로서의 수조지를 세습하였다.
반면, 백정은 이와 같은 특정한 역을 지지 않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로부터 수조지를 받지 못하였다. 백정 대부분은 상속이나 개간에 의해 민전(民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조(田租)를 납부해야 했으며, 군역 이외의 잡다한 부역을 부담하였다. 이들은 호적에 의해 군역과 부역 수취의 재원으로 파악되었고, 부역은 정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편성되는 호등제(戶等制)에 따라 징발되었다. 국초 이래 공민왕(恭愍王) 대까지 구등호제가 수취의 기준이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우왕(禑王) 대를 전후해서 삼정호(三丁戶) · 쌍정호(雙丁戶) · 단정호(單丁戶)를 각기 대호(大戶) · 중호(中戶) · 소호(小戶)로 구분하고, 출정 인원에 차이를 두는 삼등호제(三等戶制)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간 부역 일수는 조선 초기를 비추어 볼 때 대략 20일에서 30일에 이르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기의 정도 군역을 부담하였다. 삼정일호(三丁一戶) 또는 이정일보(二丁一保)의 원칙에 따라 정남은 정군(正軍)[정정(正丁)]이 되거나, 정군을 돕는 봉족(奉足)[보인(保人)]이 되어 소정의 군포(軍布)를 바쳤다. 그러나 고려와는 달리 정군에 대한 수조지의 분급은 없었다. 그리고 민전을 소유한 정남은 토지의 소출 일부를 전조로서 국가에 납부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소유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편성된 호등제에 입각해 소정의 부역을 부담하였다. 즉, 태조(太祖) 대에 인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호를 편성하는 계정법(計丁法)이 일시 시행되었으나,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계전법(計田法)이 실시된 이후 정남의 부역은 소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징발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토지 8결(結)을 단위로 1명의 정남을 출역시키도록 규정되어 있다. 세종 대까지 정남의 연간 부역 일수는 10일에서 30일 정도였으나, 이후 6일로 축소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적인 수준의 부역 외에 지방 관아가 수시로 부과하는 잡다한 부역, 즉 잡역(雜役)도 부담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중기 이후 군역을 비롯한 각종의 부역이 포납화(布納化) 또는 지세화(地稅化)되면서, 조세 부담이 증가한 대신 노역(勞役)의 부담을 덜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정은 일정 면적의 토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군인(軍人) · 향리(鄕吏) 등 특정 직역의 부담자와 문무양반(文武兩班) 등 각종의 관인층에게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차등 분급했던 바, 이와 같이 인정 또는 개인에게 지급된 국가의 분급지도 정이라 불렀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존재한다. 정은 고려시대 직역 제도와 토지 제도 운영이 상호 결합된 전정연립의 제도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일정 면적의 토지를 의미하였다. 특히 직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군인 · 향리 · 기인(其人)의 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토지의 의미로서 군인호정(軍人戶丁) · 기인호정(其人戶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때 군인에게 지급된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군인호정, 기인에게 지급된 일정 면적의 토지를 기인호정이라고 불렀다.
정은 다시 면적의 차이에 따라 족정(足丁)과 반정(半丁)으로도 불렸다. 족정은 일정 면적을 충족한 토지를 족정이라 하였고, 그 반 정도의 면적을 반정이라고 불렀다. 고려 후기에 '17결=족정'이라고 하는 사료에 의거하여 족정은 17결 면적의 토지를, 반정은 그 반 정도의 면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일정 면적의 단위를 양전(量田) 단위, 수세(收稅) 단위로 활용되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한편 정을 인정과 토지가 결합된 호(戶)의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직역을 부담하는 군인호(軍人戶) · 기인호(其人戶) · 향리호(鄕吏戶)는 직역과 함께 토지도 계승되는 전정연립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군역 · 기인역(其人役) · 향리역(鄕吏役)을 지고 있는 이들 호는 정호층(丁戶層)으로서 특정 직역을 계승하면서 전정을 연립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75, 선거(選擧)3, 향직(鄕職), 현종(顯宗 9년조에 의하면 고려시대 군현(郡縣)의 크기를 ‘1,000정(丁) 이상 주(州)’, ‘500정 이상 주’, ‘300정 이상 주’, ‘100정 이상 주’, ‘100정 이하 주’ 등으로 나누어서 향리의 수를 정하였는데, 이때 정을 정호와 백정호를 포함하는 호의 의미로 보는 견해와 관련이 있다.
이외에 기인에게 주어진 전정은 기인호정, 지리업(地理業) 종사자와 악공(樂工) · 공장(工匠) 등 무산계(武散階)를 가진 자에게 지급한 별사전(別賜田)은 별정(別丁)이라 불렸다. 이와 같은 전정은 고려 말의 과전법(科田法)에도 그대로 수용되어 작정제(作丁制)를 성립시켰다. 즉, 5결의 토지를 하나의 정으로 구분하고, 이에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대로 지번을 매겨 작정했던 것이다. 예컨대, ‘天字丁(천자정)’은 ‘天字(천자)의 지번이 매겨진 5결의 토지’라는 의미였다.